독일살이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날씨, 무뚝뚝한 사람들, 답답한 행정처리 등 다양한 부분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병원 가기 어려운 점'이다. 그럼 진료과 중 가장 만나기 어려운 전문의는 무엇일까? 여태까지 내 경험에 의하면 단연 (공보험 환자를 받는) 피부과다.
관심 있는 분들은 아시다시피 독일의 보험은 크게 공보험과 사보험으로 나뉜다. 공보험은 월급의 약 16%, 사보험은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매월 약 1000유로 이상을 지불한다. 사보험은 예약이 1-2주 안에 잡힌다는 장점이 있지만, 한번 옮겨가면 다시 공보험으로 돌아오기 쉽지 않기에 많은 독일인들은 불편을 감수하고 공보험을 유지하는 편이다. 사실 공보험도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닌데, 이 공보험으로 피부과를 가려면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냥 인내심이 아니라 도를 닦을 수준의 인내심이 필요하다.
일단 동네에 피부과 개수 자체가 적고 환자는 많기에 예약은 기본 1.5~2개월 이후에나 잡힌다. 피부과는 대부분 응급(죽을병)이 아니기에 병원에서도 급한 환자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10년 넘게 독일에 살면서 피부과에 간 건 손에 꼽으며 모두 기억이 날 정도다. 미용목적이 아닌, 질병치료를 위한 방문이었다(미용목적 피부과는 사보험 전용이며 에스테틱 전문 피부과가 따로 있다. 공보험 환자들은 비용을 지불하고 방문할 수 있다).
최근 정형외과 질환인 줄 알고 있던 게 피부와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으로 휴가를 갔다. 나는 줄곧 한국에서 보험료를 지불하고 있기에(참고로 남편은 외국인증 없고 보험에도 가입되어있지 않다. 남편은 한국에서 병원에 가지 않는다. 혹시나 오해하는 독자분들이 계실까봐 적는다), 한국에서 피부과 예약을 하고 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한국에 가서 예약을 하려 유명하다는 동네 피부과에 전화를 했다. 수화기 너머 직원분은 친절한 말투로 "그냥 오라"고 하셨다. 이게 가능하다고?라는 생각과 동시에, 아 맞다! 한국 병원은 그냥 가면 되지. 예약 없이 아무것도 안 되는 생활에 너무 적응돼서 예약이 없으면 불안한 내가 어지간히 독일스럽게 느껴졌다. 반신반의하며 설마 빠르면 얼마나 빠를까 하고 피부과에 갔다. 그리고 정확히 [집에서 병원까지 이동+진료+집으로 귀가]까지 1시간이 걸렸다. 병원에 다녀오면서도 이 속도가 지금 실화인지 현실감이 없을 정도였다.
독일이었다면? 아무리 짧아도 30일, 길면 60일이 걸릴 일이었다. 60일이라고 가정하면 한국이 독일보다 무려 1440배 빨랐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한국이 세계최고로 빠르다"라고 하는데, 숫자로 보니 이건 국뽕이 아니라 팩트였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의 속도는 사람을 갈아넣기에 가능하다"고.
맞는 말이다. 병원만 봐도 직원 한 두 분이 온종일 혼이 쏙 빠지게 움직이고, 회사에서는 아파서 병가 한 번 쓰려면 몇 단계의 승인절차를 거쳐야 하는 건 물론, 웬만큼 아파 보이지 않고서는 병가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한국의 의료 서비스가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20분, 30분 기다리는 것조차 즐거운 일이었다.
만약 한국에서 병가 내기가 수월해지면 독일처럼 병원 가기가 어려워질까? 그렇진 않을 것 같다. 여기엔 독일과 한국 병원의 수익구조가 다른 점도 살펴봐야 하는데, 얘기가 길어지니 다시 글의 주제로 돌아와 보자.
환자입장에서 나는 백이면 백 한국의 속도에 손을 들어줄 거다. 독일은 정말이지 '지금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큰일 날 상황'이 아니면 하루이틀 내로 전문의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결국 예약을 기다리는 동안 원치 않게 병을 키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독일 병원 시스템에 적응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래도 죽지 않았으니 괜찮아'라며 스스로 끊임없이 정신승리하는 것이다. 내리 채찍질만 하다가 당근하나 주면 그게 그렇게 감사하지 않은가.
dm, Rossmann 같은 독일 드로게리샵에 질병에 좋다는 온갖 차종류가 즐비하고, 한국에서 듣도보도 못한 민간요법이 유행하는 건 이렇게 답답한 상황을 나름의 방법으로 이겨내려는 독일인들의 웃픈 지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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