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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전부터 F를 끌어올려보세요

by 가을밤

평소 MBTI나 혈액형, 별자리 등을 잘 믿지 않는 나지만 MBTI 검사를 할 때마다 같은 유형이 나오는 걸 보면 어느 정도 규정할 만한 성격 특징은 있는 것 같다. 재밌는 건 한국에선 항상 F가 나오는데, 독일 국경만 넘으면 귀신같이 T로 바뀐다는 점이다. 장기거주하며 쌓인 경험치로 인해 독일 공항에서 생존용 성격으로 자동 교체(?) 되나 보다.


어쨌든 독일에선 확실히 F보다 T가 속편하다. 그 이유는 감정적으로 접근하면 될 일도 안되고, 조금 짜증 날 일이 폭발지경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독일인들 전반적으로 어떤 이슈를 다룰 때 차가울 정도로 굉장히 객관적으로 처리하는 편이다. "그게 좋은 거 아니냐"라고 하실 수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예를 들어, 세탁기를 설치해 주기로 한 기사가 오전 10시~오후 2시 사이에 온다고 해놓고 깜깜무소식이다. 그리고 오후 7시가 돼서야 갑자기 집에 들이닥쳤다. 황금 같은 시간을 날려버렸으니 화나고 사과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하지만 그들은 사과하지 않는다. "내가 늦으려고 한 게 아니라 다른 일이 터졌다"라고 말할 뿐. 즉, '다른 일'은 내가 만든 게 아니니 내 잘못이 아니고, 고로 사과할 이유도 없다는 것. 독일에선 이런 논리에 입각한 대화법이 굉장히 일반적이고 흔하다. 그래서 한국인 입장에서 사과 한마디면 마음이 누그러질 일도 부글부글 끓게 되는 거다. 하지만 화를 내봐야 어쩌라고 식 대응만 돌아올 것이다. 따라서 문제가 생겨도 화는 일단 넣어두고, "그래 왔으니 다행이지. 늦게 온 대신 제대로 해라" 식의 요구를 하는 게 본인의 정신건강에 좋다.




하지만.

이런 독일에도 종종 F의 모먼트가 필요한 상황이 있으니, 바로 '내가 아쉽고 급한 상황'이다. 물론, 십중팔구는 감정적인 호소가 안 먹힐 것이다. 그래도 한 번은, 열에 한 번쯤은 먹힌다. 그들도 사람이기에.


얼마 전 현금(동전)이 급하게 필요한 일이 있었다. 원래 무료였던 동네 주유소 타이어 에어펌프가 3개월 만에 다시 고장 나서 옆동네 주유소로 갔는데 하필 거긴 유료였고, 나는 반드시 그날 공기압을 넣어야 했다. 이럴 때 쓰는 방법이 있는데 (작년에 한 주유소 직원이 알려줌), 주유소에서 1-2유로짜리 과자를 카드로 결제하고 환불 처리하는 것이다. 독일은 카드결제를 해도 온라인 쇼핑몰이 아닌 이상 무조건 현금으로 환불해 주기 때문에 환불을 하면 자동으로 현금이 생긴다.


그래서 그날도 2유로짜리 초콜릿을 들고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환불을 부탁했다.




그러나 하필 그날 만난 직원은 [독일인] 스테레오 타입에 딱 들어맞는, 50대 이상+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인상+얼굴에 웃음기가 전혀 없는 중년 여성이었다. 역시 예상대로 그녀는 딱 잘라 "안 된다"라고 말하며, "사장이 환불 건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장이 있었다면 직접 말했겠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부탁할 사람은 그분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반신반의 성공확률 50%를 걸고 F모먼트를 꺼내기 시작했다.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띠며 친절한 말투를 장착하고, "제가 미리 알았으면 당연히 동전을 챙겨 왔죠. 원래 가던 곳은 무료인데 거기 기계가 고장 났지 뭐예요? 여기도 무료면 참 좋은데 아니잖아요. 근데 기계가 참 신식이고 좋긴 해요. 제가 오늘 정말 급해서 꼭 여기서 펌프를 쓰고 싶거든요. 딱 한 번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 혹시라도 사장님이 뭐라고 하시면 제가 전화번호라도 남길까요?^^"


말이 끝나니 현타가 왔다. 2유로가 없어서 이런 아부를 떨고 있다니. 차가운 돌상에 포옹하는 기분이네.




내 말이 끝나고 약 3초 정도 정적이 흘렀다. 그 직원은 빤히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결제하세요".


아 됐다.ㅋㅋㅋㅋ 50%의 확률이 성공했구나. 이어서 기계 작동법도 물어봤으나 그 직원은 더 이상 내 요구를 들어주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거기 사용법 다 써있는데 뭘 물어봐요?"라며 있는 정 없는 정 다 털어서 미소를 날려준 대가로 가벼운 빡침을 선사했다.


아무튼 독일에서도 가끔은 장착하자. F의 모먼트를.

언제 어디일지 몰라도 분명 당신에게 0.1 정도는 도움이 될 것이다.



제목 사진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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