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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의 정의를 다시 하자

by 가을밤

우리나라는 단연코 택배와 온라인 쇼핑 강국이다. 단순히 국뽕에 차서 하는 말이 아니라, 세계 어디를 가도 당일배송, 로켓배송, 새벽배송이 모두 가능한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특히 독일을 겪어보면 <택배>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를 다시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 의미가 무색해지는 경험을 한다.


택배의 정의는 이렇다: 편물이나 짐, 상품 따위를 요구하는 장소까지 직접 배달해 주는 일(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단연코 '요구하는 장소까지 직접 배달해 주는' 것인데, 독일은 이게 안된다. 그런데도 과연 택배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온라인에서 주문하며 배송주소에 우리 집 주소를 적는다. 그러나 실제로 택배가 도착하는 장소는 집이 아니라 '집 주변 어딘가'이다. 이 '어딘가'는 같은 건물에 사는 이웃이 될 수도 있고, 옆 건물 주민, 정원, 집 근처 세탁소, 길가의 작은 편의점, 시내 우체국, 옆동네 가게 등 다양하고 창의적이다.


정석으로 일하는 택배기사라면 이렇게 다른 장소에 택배를 보관하더라도 쪽지에 택배 보관장소와 픽업 바코드(혹은 번호)를 붙여서 원래 수취인 집의 우편함에 넣어주고 가야 한다. 하지만 독일은 이미 많은 독자분들이 아시다시피 케바케의 나라다.


쪽지를 아예 다른 집에 넣기도 하고(우편함 이름을 제대로 안 보기 때문이다), 쪽지는 있으나 픽업 장소가 안 쓰여있기도 하고, 쪽지도 메일도 없고 나중에 추적해 보면 "수취인에게 정상 배송"이 떠있기도 하다. 택배를 안 받았는데 정상배송이라니?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더 황당한 경우는, 집에 있었는데 벨조차 안 누르고 택배차 오는 소리도 없었는데 "수취인 부재"로 택배가 반송되는 경우다. 반송된 택배는 재발송할 수 없고, 물건은 환불처리 될 것이다. 그 물건이 꼭 필요하다면 재주문하는 수밖에 없다. 그동안 스트레스가 쌓이고 시간은 흘러간다.


독일에 1년을 살아도, 10년을 살아도, 아니 50년을 살아도 감수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얼마 전에도 멀쩡히 집에 사람이 있었는데 택배 2개가 그대로 낯선 픽업 센터로 배송됐다. 택배를 찾으러 차를 끌고 갔으나 주차장조차 없는 대로변이라 먼 곳에 차를 대고 걸어가는데, 진심으로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23429번째 들었다.


그날부로 나는 독일에서 택배를 이렇게 정의하기로 다짐했다: 편물이나 짐, 상품 따위를 요구하는 장소의 '근처'까지 '대충 갖다놓는' 일.




여기까지 읽은 독자분들은 이런 질문을 하실 것 같아 답변도 함께 남겨본다.


-택배기사한테 문자가 안 오나?

문자 알림은 (특수한 경우 제외하고) 안 오고, 메일도 배송 혹은 반송된 한참 뒤에나 온다.

-택배기사랑 전화하면 안 되나?

불가능하다. 전화번호는 개인정보보호로 인해 알 수 없다. 또한 정기적으로 담당 기사가 바뀌기도 한다. 택배사에 전화하면 중앙 콜센터로 연결될 뿐이다.

-배송 메시지에 남기면 안 되나?

메시지를 남겨도 담당 기사 본인이 편한 장소로 배송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애초에 주문란에 메시지를 남길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나날이 욕 스킬을 늘려주는 이런 시스템에 택배비까지 한화로 최소 10000원에 육박한다(그 이하 옵션은 추적 불가). 세간에서는 유럽의 택배 시스템이 우리나라보다 약 10년 뒤처져있다고 하는데, 실제 체감하는 독일의 택배는 우리나라보다 족히 30년 이상 뒤떨어진 것 같다. 앞으로도 개선되지 않을테니 아마 10년 후에는 한국보다 40년 뒤쳐질 것이다.


제목 사진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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