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 그랬었지

by 가을밤

올해는 운좋게 일정이 맞아 한국 친정에 꽤 오래 머물 수 있었다.

가족 해외여행을 가고, 엄마따라 요즘 핫하다는 카페도 가보고, 20년 지기 친구들과도 여행가고, 육아로 몇년간 만나지 못했던 친구도 만났으니 그 어느때보다 수확이 컸던 방문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살이 초기에는 이렇게 한국에 오면 마음 한켠에서 독일이 궁금했다. 그래서 괜히 독일 뉴스를 보고, 마음 한 구석에 독일을 걸치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살만큼 살았고, 사건도 더 겪을 수 없을만큼 종류별로 겪어본 지금은 독일을 떠나오면 의도적으로 스위치를 꺼버린다. 어차피 소식이라고 해봐야 뭐 안됐다, 미뤄졌다, 서류내라 이런 식의 행정소식일 뿐일테니 체크해봤자 열만 받는다.




사람을 만드는 건 유전과 환경. 타고난 유전의 영향을 무시 못하지만 환경 역시 사람을 만드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기에, 오랜기간 기존과 다른 환경에서 살다보면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다. 정작 자기 자신은 느끼지 못하지만 주변사람들은 분명 안다. 그리고 종종 말해준다. 이전에 내가 어땠는지.


나는 한국서 누구보다 바쁘게 살던 사람이었다. 물론 20대 중후반 독일가기 전까지 한정이지만, 아마 더 있었어도 비슷했을 것 같다. 고등학교땐 허벅지 찔러가며 공부하고, 대학땐 동아리 활동을 동시에 3개 하면서 학과 수석을 놓치지 않으려 잠을 극단적으로 줄이며 공부했고, 과외 알바 중간중간 편의점에 들러 서서 식사를 해결한 적도 많았다. 물론 스트레스가 없다고 할 순 없었으나 그게 나였고, 분단위로 쪼개어 생활하는 내가 좋았다. MBTI 내향형 I이지만서도 바쁜 와중에 얻는 에너지를 얻기도 하고 성장하는게 온몸으로 느껴지던 시기였다.


독일은 나를 참 많이 변화시켰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고, 공부하고, 일하고, 나와는 너무나 다르게 생기고 다른 문화를 가진 그들과 어울리고 때로는 부딪히고 싸우는 방법을 알려줬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위축시켰다. 말하지 않아도 눈빛과 행동으로 '너는 이방인이야'를 강하게 드러내는 그들의 분위기 속에서, 부당한 것에 소리치고 대응해봐야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것을 알려주었고, 남의나라에 사는 이상 평생 안고가야 할 심리적 물리적 짐이 무엇인지 명확히 느끼게 해주었다. 그것은 결코 개인의 노력과 희망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기에, 나는 십 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것을 겪으면서 수많은 좌절과 분노를 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에서 가졌던 '성장하려는 욕구를 가진 에너지 넘치는 나의 모습'은 점차 사라져갔다.


지금의 나, 그때의 나 모두 나지만 분명히 변했다.




한국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다시금 활동적이고 에너지 넘치던 내 모습이 스멀스멀 나오기 시작했다. 일주일쯤 지나자 어느새 나는 '무언가 할 일'을 찾고 있었다. 짧지만 돈을 벌 수 있는 일, 그리고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방법을 무의식적으로 찾고 있었다. 해가 잘뜨는 날씨에 밖에 나가는 것만으로 행복했고, 지나가다 마시는 커피 한잔과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활력이 생기고, 종종 날씨가 흐리더라도 독일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기에 전혀 싫지 않았다. 그냥 온전히 내 모국과 내사람들이 나를 반겨주는 것 같았다.


나는 사람마다 분명히 '에너지가 맞는 곳'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꼭 평생에 하나의 장소일 필요는 없고, 한 번 안맞았다고 앞으로도 안맞으란 법도 없다. 누군가에게 한국은 20대까지 천국이었지만 50대엔 지옥일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독일이 그럴 수도 있다. 또 갑자기 인생의 어느 챕터에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 살게될 수도 있다.


그게 운명인지 팔자인지 운인지 모르겠지만, 인생에선 직관적이고 감각에 의한, 소위 'Bauchgefühl(배느낌=촉)'이 가리키는 선택이 맞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제목 사진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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