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nghai, 2016.04.13 - 2016.04.16]
<비포선라이즈>를 본 사람이라면 으레 그렇듯, 나 또한 낭만적인 만남을 상상하며 빈에 갔다. '어쩌면 그곳에서 마음이 통하는 누군가를 우연히 만나서, 셀린과 제시처럼 오페라극장 앞에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게 될지도 몰라.' 이런 어쩌면혹시나설마 하는 생각들을 지워버리기엔, 영화 속 장면 하나하나가 내 머리에 남긴 자국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결과적으로 아주 물거품이 된 상상은 아니었다. 호스텔에서 다른 나라 여행자들을 만나 술을 진탕 마시며 새벽까지 술게임을 했고(마피아가 글로벌 게임이었을 줄이야), 한인민박에서 만난 언니랑은 부다페스트에 가서 먹방투어를 했으니 말이다. 물론 (에단호크 비주얼의) 미국인 제시를 못 만난 것은 아쉬웠지만, 생각해보니 나도 줄리델피가 아니므로.. 뭐, 어쩔 수 없지.
빈에서의 나는, 내내 맥주에 취한 채로, 대단치도 않은 깨달음을 여기저기 외치고 다녔다. "영화 같은 로맨틱한 만남이 있기 위해서는 '금발에 늘씬하고 영어를 잘하는 프랑스 미녀와, 그 늘씬한 미녀보다도 키가 반 뼘은 더 큰 데다가 영어가 모국어이기까지 한 미국 미남'이 전제조건이다"라고. 좀 열폭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잘 먹고 잘 놀고 잘 보고 돌아왔다. 그러니, 그걸로 퉁쳐야지 뭐.
이런 로맨스니 미남미녀니 하는 나의 생각들이 얼마나 유치했는지를 알게 된 것은 시간이 조금 흐른 뒤의 일이다. <비포미드나잇> 개봉에 맞춰 시리즈 세편을 연달아 봤던 2013년. 나는 그제야 내가 간과했던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건 바로 비포 시리즈는 그저 예쁜 남녀가 유럽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는 로맨틱 영화가 아니란 것이다.
영화의 포커스는 '길' 위에서 '걸으며' 이어지는 '대화'에 맞춰져 있다. 하염없이 길을 걷는 셀린과 제시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대화를 들려주는 게 비포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인데. 나는 그들이 처음 만난 도시를 여행한단 사실에 흥분해서 이 본질을 완전히 간과했던 것이다. 관광지의 두 남녀라는 표상만 좇다가 그 알맹이는 내팽개쳤으니, 퉁치는 거고 뭐고, 젊은 날의 추억이고 뭐고, 그저 부끄러움만 남을 수밖에.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유럽에서 미남미녀가 우연히 만나 사랑한다'가 아니라, '길 위에서 만난 두 사람이 대화를 통해 인연이 된다'이므로, 셀린&제시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미모도, 유럽도 아니다. 그저 튼튼한 두 다리와 한참을 걸을 길, 그리고 이야기를 나눌 상대면 족하다. 물론 이 세 가지 조건을 전부 갖추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또 시간이 훌쩍 지나고서야 가능했다. 바로 4개월 전의 상하이에서.
<짭퉁선라이즈>을 찍기에 상하이는 거의 완벽했다. 봄을 완전히 머금은 날씨였고, 걷기 좋은 평지가 끝없이 이어져 있었으며, 무엇보다 "셀린"이 있었다. 말(언어와 대화 모두)이 통하는 데다가 현지 맛집과 카페를 섭렵해둔 인생 최고의 가이드. 게다가 풍기는 분위기도 프랑스인 같은 그분. (또 심지어 헤어스타일도 셀린과 비슷하고 이니셜마저 S) 나는 비록 금발 미남 제시가 아니지만, 아무 계획 없이 셀린을 따라다니고 끊임없이 듣고 말할 자신은 있었으니. 3박 4일의 선라이즈, 순조롭게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