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일하는가?
백수의 시작은 퇴사가 아닌 입사라고 했지요?
그러니 일에 대한 이야기부터 먼저 해보겠습니다.
커피 한잔 하면서 할까요?
여기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이요!
벽보 붙이기, 호프집 서빙, 한식당 서빙, 카페 종업원, 구내식당에서 배식하기, 도서관 책 정리하기, 설문 조사원, 여행 가이드, 여행사 상품 기획, 항공사 사무 보조, 은행 업무 지원, 어시스턴트, 여행작가, 독립출판물 제작, 여행상품 카피라이터, 컨설팅회사 업무 보조, 프레젠테이션 ppt 작업...
"알*몬의 알바 구인 광고인 가요?"
아니요, 지금까지 제가 했던 일의 종류이자 역사입니다. 이렇게 나열해놓고 보니 정말이지 다양한 종류의 일을 오랫동안, 꾸준히, 끊이지 않고, 해왔구나 싶다. 그것도 앞뒤 맥락도 없어 보이는 일들을 말이다. 과연 그럴까? 셜록이 사건을 추리하듯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 옹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Connecting the dots. 현재는 '점'에 불과한 일들이 의미 있는 '연결 고리'를 만들어 미래에 생각지도 못한 일과 연결된다고. 그 무수한 점들이 모여 선으로 면으로 확장된다고. 그러니 인생에 쓸모없는 일이란 없다고.
"글쎄요, 돌아보면 쓸데없었던 일들도 많은데, 이를테면 살면서 솔직히 더하기 빼기 말고는 할 일이 없는데 수학 공식은 왜 그렇게 외운 걸까 싶어요. 그러니까 점들이 대체 어떻게 연결된다는 거죠?"
저는 더하기 빼기도 잘 안돼서 아이폰의 계산기를 늘 이용합니다만... 아무튼, 밤하늘에 흩어져있는 별과 같은 점들을 하나하나 연결해볼까요. 원스 어폰 어 타임... 나의 첫 알바는 학생 시절 여행 상품을 홍보하는 포스터를 벽에 붙이는 일이었다. (중간중간 밥을 푸고 맥주와 커피를 나르고 책을 정리하고 설문조사도 했다. 이것은 별 주위를 공전하는 행성 같은 존재의 일이라고 해두자) 그게 계기가 되어 사람들을 줄줄이 이끌고 유럽으로 단체 배낭여행 가이드를 가게 되었는데 꽃보다할배의 이서진 같은 역할이었다고나 할까. 그 일은 나를 여행의 직업 세계로 안내했고 여행상품을 기획해서 만드는 업무도 하게 되었다. 그다음은 항공사에서 엑셀에 데이터를 인풋 하는 일을 했다. 여행사 일과 비슷한 점이라곤 1도 없었지만 아마도 동종 업계의 경력이 있다는 이유로 나를 써준 것 같았다. 여하간 그 일은 생뚱맞게도 나를 은행으로 인도했다. 역시나 비슷한 점이라고는 1도 없었지만 엑셀과 데이터를 다루었다는 점이 (사실 나는 숫자에 정말 약한 수학 알못인데) 나를 뽑은 이유인 듯했다. 일을 하다 알게 된 건 나만 숫자에 약한 게 아니더란 사실이었다. 사람들의 전공 분야는 다양했다. 영문학, 철학, 문화인류학, 의류학, 심리학, 등등. 한 직원은 끝끝내 자신의 전공을 밝히길 거부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수학과로 드러났다. 어쨌거나 나는 그곳에서 은행 상품 세일즈를 위한 프레젠테이션 ppt를 열심히 배우고 만들었다. 이 일이 훗날 나를 컨설팅회사로 이끌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그리고 틈만 나면 여행을 다녔다. 여행은 직장 생활의 박카스요, 운동 후 마시는 한잔의 시원한 맥주 같았다. 인도는 일 년 여행한 사람보다 단 하루 여행한 사람이 훨씬 말이 많다는 이야기가 있다. 내가 딱 그 짝이었다. 아직까지 인도는 못 가봤지만 짧은 휴가를 이용해 짬짬이 다닌 여행의 기록들을 그러모아 여행 에세이를 쓰게 되었고 이후에도 말들은 계속 이어져 독립출판물도 만들게 되었다는 이야기. (아유 숨차)
"이건 정말이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뜬금포 같은 일의 변천사로군요."
입사의 세계란 참으로 오묘해서 알다가도 모를 일이죠. 아무튼, 벽보 붙이기에서 시작해 일용직, 단기 알바, 장기 알바, 아웃소싱, 비정규직, 정규직, 예체능을 두루 거치며 백수에 이르기까지 점들을 쭈욱 연결해보니 어느덧 나만의 오롯한 별자리 하나가 생겨나 있다. 이것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지금의 점이 나를 또 어디로 데려갈지 제법 궁금해진다. 앞으로도 모양을 바꾸며 자유롭게 뻗어나갈 이 별자리를 '자유인 백수 별자리'로 명명하노니 (땅땅땅!) 장담하건대 그 말이 전적으로 옳다. 세상에 쓸모없는 일이란 없지 말입니다.
"얼씨구, 그런데 왜 백수가 됐어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아니, 두 종류의 일이 있죠.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 백수가 되기 바로 전에 한 일은 컨설팅회사에서 프레젠테이션 ppt를 만드는 업무였다. 자그마치 10년 넘게 했는데 누군가 무슨 일을 하냐고 물어볼 때마다 설명하기가 다소 애매한 일이었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말 그대로 하루 종일 파워포인트와 씨름을 하는 일이다. 컨설팅 회사는 클라이언트에게 컨설팅을 의뢰받아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진행상황 보고를 위해 컨설턴트들이 각종 자료를 취합하고 데이터를 분석하면 나는 그 장표들을 넘겨받아 파워포인트를 이용해 프레젠테이션 차트를 그린다. 끝! 어때요, 참 쉽죠? (밥로스 아저씨를 떠올려보자)
여기서 잠깐.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초코파이를 나누는 정처럼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실 거예요. 세상의 모든 일은 그 속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눈물, 콧물, 피(드물지만 일하다 보면 종이에 베이기도 하니까요)와 땀, 확-고마-씨, 쎄리, 이런 게 죄다 디폴트로 깔려있다는 사실을요. 쉽게 저절로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을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말이에요. (일의 세계에는 실로 다양한 허들이 있는 것이죠)
"참 오래도 했네요. 그럼 이제 눈 감고도 그리는 지경이 되어 머릿속에서 샤방샤방한 프레젠테이션이 샤랼라 펼쳐지겠어요, 대체 뭐가 문젭니까?"
얼마 전에 언니네 이발관 이석원 작가의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을 읽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요, 장 자크 상페. 아시죠? 전 세계인의 마음을 따뜻한 그림으로 사로잡는 프랑스의 유명한 일러스트 화가. 설령 이름은 모른다 해도 누구나 한 번 즘은 그의 그림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 그가 사실은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고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려왔다는 말에 그는 위로를 받았다고. 자신 역시 음악 일을 좋아하지 않았고 생활을 위한 수단으로써 해왔으며 이제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는 느닷없는 고백에 갑자기 마음이 포개지며 나 역시도 위로를 받았다가 아니지, 어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이토록 멋진 그림과 음악을 창조해낸단 말인가?!라는 사실에 받았던 위로를 다시 빽-했지 말입니다. (일의 세계에는 실로 놀라운 사람들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더는 하기 싫어서 관둔 거예요?"
세상에는 다시, 두 종류의 일이 있죠. 적당한 일과 너무 많은 일. 여기 샷 추가요! 찐한 아메리카노를 들이키며 이메일을 연다. 푹 자고 일어나 출근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피곤이 몰려오는 상황이 종종(아니 거의 매일) 벌어진다. 이것 좀 해주세요. 저것 좀 부탁해요. 일감. 이 노므스키 일감들이 문 열자마자 번호표를 뽑아 들고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린다. 때로는 번호표도 없이 새치기하는 몰지각한 일감도 부지기수다. 재미있는 드라마도 끝이 있고, 축구도 연장전 끝에 승부차기로 끝을 보는데 일이란 왜 끝이 없을까. 혹시 내가 전생에 제우스 신의 분노를 산 것일까? 오늘도 시시포스가 되어 오늘의 바위를 하염없이 굴린다. 신화 속 시시포스는 바위를 영원히 굴려야 하지만 직장인인 나는 다행히 퇴근이 있다! 하루 종일 영차 굴려서 저녁에 산 정상 너머로 간신히 떨어뜨리면 다음날 아침 어김없이 누군가 바위를 원 위치에 더 많이 가져다 놓았다. 오 마이 신이시여, 이 무슨 가혹한 형벌이란 말입니까! 영원히 굴려야 한다는 점에선 결국 마찬가지였죠.
"아니, 일이란 게 끝이 어딨어요? 그럼 회사 문 닫는 거지."
물론 나도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라구요. 입사 때를 떠올려보면 여기서 바위 한번 굴려보게 해 주십사, 얼마나 어떻게 잘 굴릴 수 있는지 심혈을 기울여 이력서를 쓰고 염원을 담아 인터뷰를 했던가. 나의 문제점은 별다른 고민 없이, 한치의 의심도 없이, 열심히 바위를 굴리고 또 굴렸다는 거다. 그건 마치 상대방을 잘 모르고 오랫동안 사귀는 일처럼 위험했지만 그런 줄도 모르고 잘도 출근했고 즐겁게 퇴근했다. 하고 싶은 일들은 나중으로 미루고 하루라는 커다란 믹서기에 나를 한 줌 넣고 열정 한 움큼, 버럭 한 꼬집, 단맛이 필요하니까 커피타임 한 스푼, 버티기를 뭉텅뭉텅 썰어 넣고 너무 뻑뻑하지 않게 눈물도 두어 방울 넣어 휘휘 저어 달달달 갈아서 월급이라는 알약과 함께 아무 생각 없이 꿀꺽 마셔버린다. 그러면 배도 부르고 고민도 이내 느슨해졌다. 그러는 사이 나는 자발적 노예가 되어가고 있었다. 돈이 들어오는 대신 체력, 생각, 에너지, 창의성, 생기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서서히 몸에서 빠져나가면서 내가 점점 없어지고 소모되는 느낌이 들었다. 여긴 어디? 난 누구?
"근데 일이 무슨 죄에요?"
아, 일은 죄가 없죠. 일, 넌 내게 많은 것들을 주었어. 나를 먹이고 입히고 생계를 유지하게 해 주고, 졸리는 나를 아침마다 일으켜 세우고, 어찌 됐든 출근부터 퇴근까지는 규칙적인 생활 리듬을 만들어주고, 하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을 배우고 경험하게 하여 그 속에서 성장하게 하고, 나와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고 세계의 다양성과 따뜻함은 물론 냉정함과 호락호락하지 않음도 알게 해 주었지. 일은 잘못이 없어요. 일을 너무 많이 하는 사회 구조가 잘못인 거죠. 일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이렇게 많이 일하는가? 시스템을 바꿀 순 없는가? 나는 왜,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생계를 유지하는 이유 외에도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인정을 얻기 위해서는 아닐까. 그렇다면 회사인으로 돈을 벌지 않더라도 지역 공동체에 참가해서 동네의 발전을 도모하고, 재미있는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수도 있고,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고 동물단체를 후원하고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사람들과 나누고 하면서 내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면?
지구를 구하고 말겠어요! 이 회사의 일은 나의 가치관과는 맞지 않아요! 사람들은 이런 샤방한 이유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지 않아요. 슈퍼맨도 뭔 일 일어나기 전엔 평소에는 그냥 평범한 복장으로 회사 다니는 거 아시죠? 그저 저마다의 이유로, 생활의 균형을 찾고 싶어서, 감당하기엔 일이 벅차서, 너무 힘들어서, 구조가 불합리하거나, 자신이 노예처럼 여겨져서, 나라는 존재가 한낱 수단으로 소멸해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세상엔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찾고 싶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혹은 하기 싫은 일을 안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살아남고 싶은 게 아니라 살고 싶어서. 마음속에 새로운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도중에 갑자기 마음에 들지 않거나 그림을 망치면 어떻게 하죠? 밥로스 아저씨가 말한다.
실수를 한 게 아닙니다.
단지 행복한 사고가 일어난 거죠.
(We don't make mistakes.
We have happy accidents.)
그러니 어서 퇴근들 합시다.
잠깐만요, 이건 정말 구인 광고예요.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현재 하나의 실험적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프로젝트 이름은 '영원한 고용’, 2026년 완공되는 코르스베겐 기차역에서 일할 종신 직원을 뽑는 것이다. 이 직원이 할 일은 아침마다 출근해 승강장 형광등을 켜고, 해가 지면 불을 끄고 퇴근하는 게 전부다. 출퇴근 사이엔 영화를 보든, 잠을 자든, 역 밖에 있든 상관없다. 월급은 2만1600크로나(약 260만 원). 여기에 연봉 인상, 휴가, 퇴직연금까지 보장된다. 별다른 자격 없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는 이 일자리는 코르스베겐역 디자인 공모전에서 당선된 스웨덴 예술가 2명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이들의 응모작에는 자신들이 설계한 역사에 이 ‘비생산적’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핵심 콘셉트로 포함돼 있다.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인간이 쓸모없어질 것이라는 위협이 커지고 있다. 우리도 머잖아 코르스베겐역 직원의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이들이 밝힌 프로젝트의 취지다. (출처: 오피니언 [횡설수설/정임수 논설위원] dongA.com)
이 무슨 어린왕자의 가로등 불 끄기 같은 일인가! (책 속의 그 별은 너무도 작아 일 분에 한 번씩 회전하는 까닭에 가로등 불을 일 분에 한 번씩 켰다 껐다 해야 해서 가로등 지기는 쉴 수가 없었지만요) 스웨덴 기차역의 형광등 불은 정말로 격.하.게. 켜고 끄고 싶어 진다. 이것이야말로 자유인 백수에게 적합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랴! 당장 스웨덴으로 달려가고픈 마음을 억누르고.
저도 오늘은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딸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