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사람은 백수가 될 수 없어요.
"오늘의 커피, 숏 사이즈로, 여기 텀블러에 주세요."
텀블러를 가지고 다닌 지 2년이 다 되어간다. 카페에 개인 텀블러를 가져오면 환경보호금으로 300원이 할인된다. 지구온난화로 매년 얼음이 점점 녹아 삶의 터전에 위협을 받는 북극곰 생각 25%, 인간들이 버린 플라스틱 쓰레기를 한가득 삼킨 고래 생각 25%, 비록 적은 금액이지만 할인이 되는 건 기분이 좋으니까 25%,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려서 25%.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텀블러에는 주문한 사이즈보다 커피를 조금 더 많이 주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도 있다. 직장인들이 한창 일할 시간인 평일 오후 3시.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켜놓고 턱을 괸 채 주위를 둘러본다. 창가 자리로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 사이로 존 콜트레인의 재즈가 나직이 흐르고, 윙-하고 그라인더가 돌아가며 고소하면서 달큼한 커피 향을 사방에 퍼트리고, 노란빛의 은은한 조명 아래 놓인 부드러운 재질의 둥근 나무 테이블과 푹신한 초록색 쿠션이 붙어있는 의자가 말없이 졸고 있다.
오른쪽 자리에는 아이들의 공부에 대한 화제로 시작해 스카이캐슬 드라마 이야기로(안 듣는 척 귀 쫑긋쫑긋) 열을 올리는 학부형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왼쪽엔 두꺼운 책을 펼쳐 놓고 취업에 대한 잡담을 하고 있는 청춘남녀가, 건너편에는 인테리어 업계에 종사하는듯한 남자 셋이 욕실과 타일 공사와 까다로운 고객(아마도 진상인)에 대한 논의를(거의 하소연에 가까운) 나누고 있다. 문이 열리며 카드 목걸이를 목에 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오는가 싶더니 저마다 주문한 커피를 손에 들고 재빨리 카페를 나선다. 이어 고객에 지친 인테리어 업자들이 나가고,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한다며 학부형들이 일어나고, 청춘남녀도 자리를 떴다. 카페는 다시 잠시나마 나만의 공간이 되었다.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뱉었다를 몇 차례 반복한다. 부드러운 테이블과 푹신한 의자와 그 사이를 흐르는 공기를, 시간을, 여유롭게 누리는 자는 언제나 나, '백수'이다.
무슨 일 하세요?
묻는 질문에 "퇴사하고 백수로 지내고 있어요." 하면 돌아오는 대답이 비슷하다. 좋겠어요. 부럽네요. 아마도 묻는 이의 귀에는 백수보다는 '퇴사'라는 단어가 더 큰 울림을 주었겠지만 말이다. 여태껏 부럽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회사에 다닐 때를 떠올려보아도 누군가로부터 부러움을 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여행을 간다고 하면 부럽다는 말을 가끔 듣긴 했다. 그건 언젠가, 자신도 갈 수 있고, 가고 싶지만, 당장은 못 가는데, 좋겠다.라는 뉘앙스였다. 반면, 퇴사한 백수에 대한 부러움은 자신은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자유로운 상태에 대한 로망이자 동시에, 그렇다고 정말로 백수가 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 걱정, 두려움을 이미 겪은 자(먼저 매 맞은 사람이랄까)에 대한 부러움이다. 이러한 부러움에는 어떠한 질투나 시기도 없다. 그야말로 순도 100%의 부러움이다. 아무튼 생각지도 못했던 부러움을 이렇게 받게 될 줄이야.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한때는 나도 백수를(퇴사를) 부러워했었다. 왜였을까? 그 마음의 근원에는 '결핍'이 있었다. 부러움이란 결국, 나한테 없는 것을 욕망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결핍은 또한 창조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바로 백수가 출발한다.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김영민 교수의 칼럼 <설거지의 이론과 실천>에서 (너무나 훌륭한 칼럼이므로 찾아서 꼭 읽어보시길 추천드린다) '설거지' 자리에 '백수'를 슬쩍 끼워 넣어 보자.
백수의 존재론. 백수는 과정입니다. 백수는 긴 인생 과정의 일부입니다. 백수의 시작은 퇴사일까요? 아닙니다. 백수의 시작은 입사입니다. 일단 입사를 해야 퇴사도 가능한 겁니다. 그럼 백수의 끝은 실업자일까요? 아닙니다. 백수의 끝은 '자유인'입니다. 백수란 일을 하다가 안 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본 세팅이 자유인입니다. 일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백수도 일을 합니다. 먹고살 궁리를 늘 합니다 (당장 돈이 안돼서 그렇지). 어쨌든, 스스로 일을 줄이고 그에 따라 늘어난 시간을 어떻게 풍요롭고 창조적으로 채우며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공부하고 고민합니다.
사회는 워라밸을 왈왈 부르짖으며 근무 시간을 줄이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실제로 일하는 시간이 대폭 줄어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내가 원하는 노동 시간은 아마도 퇴사 후, 그것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찾아오지 않을까요. 사람들은 내 맘 같지 않고 사장님 마음은 직원 맘 같지 않은 게 세상 이치거든요. 한편으로 세상은 바둑에서 로봇이 사람을 이기고(화가 나면 우리 인간은 바둑판을 확 엎어버리고 로봇에게 물바가지를 끼얹어 작동을 멈출 수 있으니 아직까진 인간이 위대하다고 봅니다만), 원치 않아도 노동에서 자동으로 해방되는(스크린 화면 보면서 햄버거 주문하는 거 싫어요), 노동이 점점 없어지는 세계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지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지요. 싫든 좋든 자의든 타의든 누구나 언젠가는 회사를 나가야 할 때가 오고 백수로 살아가야 할 시간이 훨씬 길어진 세상이 왔습니다. 그러니 백수는 청년이든 중년이든 노년이든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삶의 과정입니다.
백수의 윤리학. 백수는 귀찮은 일입니다. 퇴사도 했겠다, 일하기가 싫은 나머지 마냥 놀고 싶겠지요. 혹은 놀고 싶은 나머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며 나 대신 돈을 벌어오는 부모님에게 또는 배우자에게 빌붙어 살고 싶겠지요. 만약 백수의 삶이 편하기만 하다면, 누군가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예를 들면 이불 개기랄지(지구를 구하고 싶거든 침대 정리부터 먼저 하라고 하던데...), 설거지랄지, 청소랄지, 빨래랄지, 장보기랄지, 요리랄지, 카드대금 결제랄지, 관리비 수납이랄지... 써놓고 보니 이런 일들은 사실 백수든 직장인이든 남녀노소 불문하고 성인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해야 하는 거죠. 아무튼 혹자의 삶이 고생스럽다면 백수는 그 순간 자유인에서 좀비가 되고 맙니다. 자기 생활은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야 자유인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귀찮음을 극복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잠깐만요, 인생의 다음 단계를 위해 쉬면서 꿈 좀 꾸어보겠다는데, 뭐가 이리 복잡한가요? 나는 꿈이 있다고요!(꽝!) 네, 압니다. 바둑으로 인공지능과 맞짱을 뜨는 꿈, 고양이를 훈련시켜 줄넘기 대회에 내보내는 꿈, 접시 오래 돌리기로 기네스북에 나가는 꿈, 멍 때리기를 연마하여 해탈에 이르는 꿈,... 다 좋습니다. 일단 이불부터 개고 마당 쓸고 줄넘기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말씀드렸잖아요. 백수는 매일의 설거지만큼이나 귀찮은 일이라고요.
백수의 인간론. 숙취는 음주의 업보이고 다이어트는 식탐의 업보이며 백수는 퇴사의, 아니 입사의 업보입니다. 백수는 인생에서 누구나 한 번은 겪어야 하는 과정이기에 인간의 업보이기도 하지요. 백수란 어떤 인간인가? 일단 내가 백수가 된 덕분에 누군가가 내 빈자리를 채웠을 테니 고용 창출에 기여합니다. 회사에 다니면서 월급을 받을 때와는 달리 수입이 일정하지 않고 적게 벌므로 당연히 적게 쓸 수밖에 없습니다. 청렴결백을 주장한 바 없으나 본의 아니게 검소해집니다. 집안에 물건을 들이기보다 있던 물건을 정리하여 나눔을 실천하고 살림에도 보태니 자연히 생활이 심플해지는 미니멀리즘을 지향하게 됩니다. 때로는 300원이라도 아끼기 위해 텀블러를 늘 가지고 다니는 환경 보호자가 됩니다. 멀리 있는 대형마트보다 가까이에 걸어서 갈 수 있는 동네 가게와 시장을 이용하므로 지역 경제 활성에도 보탬이 됩니다.
누구도 백수를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백수는 부러움의 대상은 될지언정 시기나 질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승진이나 시험, 취업을 놓고 서로 경쟁하는 일은 있어도 백수가 되겠다고 서로 싸우는 일, 보셨습니까? 그런 일은 결단코 없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구토를 유발하지도 긴장감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안도감을 줍니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존재 자체가 참으로 평화롭습니다. 그러니 만국의 백수들이여, 자부심을 가지고 이제는 말할 수 있습니다. 드라마 속 명대사처럼 외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백수 있다!
모든 설거지가 이론보다 실천이 중요하듯 백수 역시 이론보다는 실천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좀비로 전락하게 될 테니까요...
나는 잘 실천하고 사느냐 돌아보면, 그럴듯하게 실패할 때가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잘 될거란 기대없이, 희망없이, 오늘의 지금을 즐겁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