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없이 산다.
“언니, 제 허리를 꽉 잡으세요.”
베트남 소녀 '땀'은 또렷한 한국어 발음으로 나를 ‘언니’라고 불렀다. 모퉁이를 돌아 큰길에 이르자 땀은 오토바이의 속도를 높였다. 그녀의 가녀린 허리에서 흘러내린 새하얀 아오자이 치맛자락이 호찌민의 후끈한 밤바람 속을 가르며 펄럭였다.
“언니, 저는 작가가 꿈이에요.”
사거리에 접어들자 땀은 오토바이의 속도를 낮추며 말했다.
뭘 쓰고 싶은데? 내가 물었다.
“연애 소설이요.”
남자 친구는 있어?
“... 아니요”
땀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럼 당장 연애부터 시작해야겠네. 연애 이야기를 쓰려면. 나도 실은 책을 쓰고 싶어.
“언니는 뭘 쓰고 싶은데요?”
글쎄... 뭘 쓰고 싶은 걸까... 아마도 여행 이야기? 혹시 <모비딕>이란 소설 알아? 그 책을 쓴 작가는 3년 동안 고래잡이 배를 탔었대. 그리고 쓴 책이 흰 고래와의 사투를 벌이는 내용이야.
“그럼 저는 앞으로 3년 동안 연애를 해야겠네요. 언니는 계속 여행을 하고.”
우리는 동시에 깔깔거리며 웃었다.
"언니, 웰컴 투 사이공! 꽉 잡아요."
오케이. 땀. 렛츠 고!
신호가 바뀌자 우리는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수많은 오토바이의 행렬과 함께 호찌민의 밤공기 속을 향해 다시 힘껏 내달렸다.
그로부터 3년이 훨씬 지났다. 그동안 땀은 연애를 하고 바람처럼 연애 소설을 썼을까?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나는 여행 소설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행 대신 퇴사와의 사투를 벌였다. 그 결과 20년 가까이 직장인으로 살다가 자발적 백수가 되었다. 마음이 힘든 날이면 땀과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후끈했던 호찌민의 밤거리를 달리며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던 그 순간이 왠지 모르게 생각났다. 그럴 때면 더 이상 설레지 않는 일을 하며 출퇴근하는 회사 인간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삶에서 다시 재미와 즐거움과 충족감을 되찾고 싶었다. 무엇보다 나를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쓰면서 살고 싶었다. 이제 너무 늦은 건 아닐까? 무슨 방법이 없을까? 그런데 밥벌이는 어떻게 하지?
그렇게 시작된 무모한 중년 백수 라이프. 백수가 되기 전엔 나도 백수가 두려웠다. 그런데 백수보다 더 두려운 게 있었으니 '중년'이었다. 그렇다. 중년. 잘 나가는 직장에 호기롭게 사표를 던져도 제발 나가지 말아 달라고 회사가 애써 붙잡지는 않는 사람. 나가는 건 쉽지만 다시 들어가기는 힘든 사람. 퇴사를 준비 없이 함부로 따라 하다가는 큰일 나는 사람. 그러거나 말거나 더 이상 회사 인간으로 살고싶지 않았다. 모아놓은 돈도 많지 않고 재능도 끼도 비빌 언덕도 믿는 구석도 없었지만 그동안 '열심히만' 살던 삶에 사표를 던졌다. 기왕 이렇게 된 바에야 최선을 다해 백수로 열심히 살아보기로 했다. 백수로? 열심히? 타인이 누군가의 '열심히'를 규정할 수 없다. 겉으론 아무것도 안하는 것처럼 보여도, 아무런 진전이 없는듯이 느껴져도, 나름대로 열심히 고민하고 열심히 구상하고 열심히 해 나가고 있는 중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흰 고래, 아니 백수와의 사투를 벌인 지 2년이 지났다. 그래서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게 되었다. 뭐냐 하면... 그게... 별일없이 산다. 생각보다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굶어 죽지도 않았다. 힘든 날도 있고 고민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하루하루가 재미있고 즐겁다. 다르게 살아보니 다르게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고, 삶의 방식이 다양해지면 실패와 성공의 기준도 다양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도 나는 최선을 다해 중년 백수로 열심히 산다. 앞으로도 계속 백수로 열심히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큰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