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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는언니 Jul 08. 2019

그냥 하기 싫은 걸 안 하는 것뿐이에요.

하기 싫은 일 리스트를 작성해보자. 그러면 해야 할 일이 보인다.

  

"스페샬 쁘라이스 뽀 유!(special price for you!)" 


터키 이스탄불의 카펫 가게 점원이 팔랑귀 손님을 낚아채기 위해 날리는 영업 멘트 같은 저가항공사의 이메일이 도착했다. "안사도 되니까 일단 드루와~ 드루와~ 애플티 한잔 마시면서 이 아름다운 카펫들을 마음껏 구경하렴." 이번엔 유혹하기 기술이 들어온다. 그럼.. 어디 한번? 싱글싱글 웃는 점원의 눈빛 속에 보이지 않는 마음속 자막이 지나간다. '절대 놓치지 않을 거예요~' 아마도 가본(붙잡혀 본) 사람은 알 테다. 빈 손으로 가게를 빠져나오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애초에 들어가지 말아야 할거슬...  

       

항공사는 친절하게도 마음속 자막을 예쁘게 디자인하고 굵은 글씨로 처리하여 직접 보여주었다. "예약은 이번 주말까지! 절대 놓치지 마세요!" 화요일 출국. 그 다음 주 목요일 귀국. 회사 다닐 때는 내기 힘든, 아니 절대로 이렇게는 내지 않을 참으로 어정쩡한 스케줄을 선택했다. 어정쩡하니까 아주 쌌다. 시간 조절이 자유로운 백수에겐 딱이다. 수많은 책에서 현자들이 말하길 시간의 노예가 아닌 시간의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이렇게 빛을 발하며 시간의 주인 행세를 하게 될 줄이야. 성수기라면 편도 요금에도 못 미칠 금액이어서 왠지 돈을 번 듯한 기분에 예약 화면을 보면서 자꾸만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돈을 쓴 줄도 모르고...

 

다만 직항이 아니어서 중간에 한번 경유해야 하고 무료 기내식도 없으며 수하물은 5kg이 넘으면 추가 요금을 지불해야 하지만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백수에겐 그것마저 오케이다. 인천공항에 도착해 체크인을 하며 가방의 무게를 재어보니 4kg. 짐은 가벼울수록 좋다. 따뜻한 나라로 가는 만큼 배낭 속엔 원피스 한벌, 일상복을 겸한 요가복 두어 벌, 속옷, 비키니 수영복, 쪼리, 선글라스, 책 두권. 화장품은 몇 년에 걸쳐 줄고 줄어 이제는 일상에서든 여행에서든 선블록, 수분 로션, 아이라이너로 단출하다. 세면도구는 현지 조달이 가능하므로 칫솔만 챙긴다. 그리고 펼치면 배낭보다 더 큰 비장의 보조 천가방이 있다. 현지에서 짐이 늘어날 경우를 대비하는 용도다. 시장 구경을 워낙 좋아하기에 아마도 이국의 식료품들을 잔뜩 사서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웬만하면 짐은 부치지 않는다. 시간이 많은 백수지만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언제 나올지 모르는 가방을 기다리는 시간만큼은 왠지 무척 아깝게 느껴진다.


출국심사 후 공항 내의 카페에 들러 기내식으로 먹을 샐러드와 커피를 샀다. 기내에서 제공되는 커피는 왜 그토록 맛이 없을까? 세계 7대 불가사의보다 난 이게 더 궁금하다. 평생 미스터리다. 열심히 연구를 거듭했지만 맛있는 커피를 공급할 수 있는 방법을 아직까지 찾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일부러 밍밍하게 만들어서 주는 것일까? 아니면 지상에선 괜찮았던 커피가 공중에서 갑자기 맛이 사라져 버리기라도 하는 것일까? 분식집에서 4-5천 원이면 사 먹을 수 있는 끓여주는 라면을 먹기 위해 거금을 내고 국적기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는 사람도 있다고 하던데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야 백수라도 감히 비싼 돈을 지불할 용의도 있건만. 공짜가 아니면 맛있으려나? 혹시나 하고 4천 원 정도를 내고 기내에서 파는 커피를 주문해 보았다. 역시나 '양말 빤 물' 같은 맛이었다. 나는 진한 커피를 선호하지만 그렇다고 입맛이 그렇게 까다롭지는 않은데... 카누도 괜찮고 네스프레소 정도면 훌륭한데...         

            

진한 커피를 마시지 못해 헤롱 한 정신 상태로 방콕을 경유하여 치앙마이에 도착해 숙소에 짐을 풀었다. 비수기여도 싸고 괜찮은 숙소들은 늘 풀 부킹이기 마련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수기의 장점은 숙소 예약 어플을 자주 체크하다 보면 빈방이 종종 뜬다는 점이다. 모든 리뷰가 칭찬 일색에 가격은 1박에 2만 5천 원인 훌륭한 숙소를 발견하고 주식 시세 체크하듯(나는 주식도 안 하는데...) 들여다보다가(나는 시간이 많으니까...) 예약에 성공했다! 나무들로 둘러싸인 숙소는 작지만 정갈하고 깨끗했고 초록의 싱그러움을 뿜어대고 있었다.


폽과 톤 커플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한 숙소 주인은 유머가 넘치고 다정하며 친절했다. 아, 오늘은 큰 마켓이 열리는 날이야! 우리가 점심 먹으러 자주 가는 식당이 있는데 로컬 음식이 먹고 싶다면 소개해줄게. 내일 디자인 페어가 열리는데 가보면 무척 재미있을 거야. 아침에 요가를 하고 왔다고? 어쩐지 건강해 보이더라. 네 짐은 작은 배낭 하나 이게 다야? 너처럼 짐 없는 여행자는 처음 봐. 체크아웃할 때 다음 숙소로 가방은 우리가 전달해줄 테니 넌 가방일랑 신경 쓰지 말고 나가서 이 도시를 마음껏 탐험하도록 해! 잠깐만 나갔다 와도 방은 그새 정리가 깔끔하게 되어 있고 그들이 가보라고 추천해준 곳들은 모두 내 취향 저격이었다. 숙소가 정말 마음에 드는데 방이 없어 떠나야만 하는 아쉬움을 토로했더니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치앙마이에는 훌륭한 숙소들이 너무 많아. 우리들처럼 그곳들도 네가 어서 와주길 기다리고 있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런 멋진 사람들 같으니라고. 왜 괜찮은 남자들은 다 게이인 것인가...!              


숙소를 떠나는 날 아침, 발코니에 앉아(1박에 2만 5천 원인데 개인 발코니가 있다니!)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책이나 읽으려고 했는데 일단 방에는 커피가 없고(1박에 2만 5천 원이라 커피가 없구나...!) 그 핑계로 책은 펼치다 말고 옆으로 치워놓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다. 카톡을 확인하고 트윗과 인스타를 돌아다니고 어제 찍은 사진도 다시 보고 구글맵으로 오늘은 어딜 갈까 고민하고 그러다 보니 체크아웃 시간. 아날로그 여행은 와이파이가 아예 안 되는 곳으로 가야 가능하려나. 아무리 생각해도 환경이 의지보다 힘이 센 것 같다. 나는 늘 의지박약이어서 자괴감에 빠지곤 하는데 알고 보면 그 의지란 것도 환경에 의해 좌우될 때가 많았다. 그래 환경을 바꾸자! 숙소 주인에게 가방을 부탁하고 책을 챙겨 진하고 맛있는 커피를 찾아 탐험을 나섰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치앙마이의 정오. 몸단장을 마친 고양이들이 그늘을 찾아 단잠에 빠져들 시간. 한낮의 느슨함마저 여행 속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나는 사람도 거의 없는 한산한 골목을 그림자를 동행 삼아 천천히 걸었다. 약속도 없고 목적지도 정해놓지 않은 걷기야말로 여행의 묘미다. 구글맵은 끄고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눈길 가는 대로 걷다가 갈림길이 나오면 주머니 속 이국의 동전을 만지작 거려본다. 앞면이 나오면 오른쪽, 뒷면이 나오면 왼쪽, 하는 식으로 재미 삼아 손바닥 위에 탁. 동전은 왼쪽을 가리켰다. 그 길엔 또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두근거린다기보다는 그저 뭐가 있으려나 하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왼쪽으로 향했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태양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SIMPLY HAPPY" 무심하게 사람을 잡아끄는 문구를 매단 카페였다. 그럼.. 어디 한번? 손님은 나 혼자였다. 커피를 주문하고 (아메리카노! 진하게!!) 공간을 둘러보았다. 탁 트인 넓은 내부엔 커피를 내리는 ㄷ자형 테이블이 있고 중간엔 커다란 나무 책상이, 양쪽으로는 작은 2인용 식탁이 놓여 있고 한쪽 벽면의 책장엔 책들이 듬성듬성하고도 나른하게 꽂혀 있었다. 천장엔 에어컨 대신 초록 빛깔의 팬이 천천히 돌아가며 테이블과 책과 나 사이의 넓은 빈틈으로 미지근하고도 부드러운 바람을 살랑살랑 불어넣어 주었다. 커피 마시며 책 읽기에(책 읽으며 꾸벅꾸벅 졸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다.


카페 주인은 무슨 즐거운 일이 있는지 연신 웃는 얼굴이었다. 유기농 채소에 조미료 없이 약간의 소금과 후추만으로 간을 하여 만든 담백하고도 건강한 음식 같은 얼굴. 그 얼굴을 닮은 공간. 카모메 식당이 떠올랐다. 주먹밥을 대표 메뉴로 내놓고 손님을 기다리지만 한 달째 파리 한 마리 날아들지 않아도 꿋꿋이 매일 아침 즐겁게 그날의 음식을 준비하는 사치에를 떠올리게 하는 그녀. 눈을 감고 세계지도를 손가락으로 찍은 곳이 핀란드여서 핀란드에 왔다는 미도리처럼 주머니 속 동전을 던져서 나온 방향이 왼쪽이어서 이곳에 오게 된 나. 어쩐지 영화 속 미도리처럼 그녀에게 말을 건네보고도 싶었다.    


"좋아 보여요. 하고 싶은 것 하며 사는 모습이."


그럼 그녀 역시 영화 속 사치에처럼 대답을 할까?


"그냥 하기 싫은 걸 안 하는 것뿐이에요."

     

그녀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걸까. 그냥 하기 싫은 걸 안 하는 걸까. 묻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어느 편이 더 행복한 일인지는 모른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명제가 강박처럼 다가오던 때가 있었다. 자유로운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현재는 미래에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 어쩔 수 없이 하기 싫은 것들을 해야 하는 나날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붙잡고 있는 걸 내려놓지 않는 한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앞으로도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시간은 늘 부족하고 그러다 재능도 없는데 헛짓하는 거 아닐까 의심만 쌓여가고 그러다 고민만 깊어지고 그러다 시간만 가고 그러다 핑계만 늘고... 그러다 문득, 하기 싫은 일은 그냥 하지 말까? 싶었다. 리스트나 한번 만들어보자 싶었다. Things to do가 아닌 Things NOT to do! 놀랍게도 적을수록 신바람이 났다. 게다가 너무 많았다. 나는 하고 싶은 일보다 하기 싫은 일을 나열하는데 그 어느 때보다 열정을 보였다. 솔직해졌다. 안 해야지 생각하니 삶의 의욕이 샘솟았다. 감정은 하기 싫은 것에 더 적극적이었다.


하고 싶지 않다 리스트: 출퇴근 지하철을 타고 싶지 않다. 분주한 아침을 보내고 싶지 않다. 정해진 시간에 묶이는 생활을 하고 싶지 않다. 에너지가 뺏기는 장소에 있고 싶지 않다. 아무리 좋아도 같은 공간 같은 사람들과 하루 종일 같이 있고 싶지는 않다. 늘 시간에 쫓기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과도한 일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 하고 싶은 것에 시간을 많이 쓸 수 없는 생활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하루에 4시간 이상 일하고 싶지 않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하고 싶지 않다. 맛없는 커피를 마시고 싶지 않다... (너무 많지만 이쯤에서 생략하도록 하겠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일 자체 보다도 일을 둘러싼 환경과 시스템에 대한 스트레스가 매우 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래서 막연하게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는 것보다 시각화를 해보는 작업이 중요하다. 하기 싫은 일을 통해 해야 할 일이 보였다.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해서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행복하기 위해서는, 붙잡고 있던 걸 내려놓고 일과 생활의 시스템과 환경을 바꾸기 위한 방법을 스스로 모색하고 당장 행동해야 한다는 거였다.




커피를 마시며 오후 내내 카페에서 책을 읽는 동안 오랜만에 모처럼 단순하게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다만, 화장실이 반전이었다. 아무래도 화장실 청소란 누구에게나 하기 싫은 일일 테니까. 너무 완벽하면 매력이 없고 반전이 없으면 재미도 없는 거니까. 지금은 비수기의 한낮이고 느슨해져야 할 시간이니까. 게다가 그녀가 내려준 커피는 깊고 진하고 달콤한 맛이 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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