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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는언니 Apr 04. 2019

백수가 되기 위한 서바이벌 키트

뭣이 중헌디?!



출근 시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4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거나 그 반대로의 여정은 꽤 복잡하고 험난하다. 인파의 물살이 어찌나 거센지 어느 날엔 서 있기만 해도 저절로 앞으로 행진이 되곤 했다. 이따금씩 현기증이 일어 제자리에서 가만히 숨을 고르는 날도 있었다. 빠르게 멀어져 가는 행렬의 무리가 마치 산란을 위해 강으로 회귀하는 연어 떼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실제로 연어 떼를 본 적은 없다.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그 모습을 보았는데 아주 장관이었다. 연어는 산란기가 되면 어릴 때 살던 강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머나먼 여정을 떠난다. 연어의 몸 어딘가에 집으로 향하는 나침반이 심어져 있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자신이 태어난 강의 냄새를 기억하고 있다가 그 냄새에 이끌려 다시 돌아가는 것일까.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신비한 이유로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바다를 건너고 거센 물살을 헤치며 고향의 강으로 돌아온 연어들은 그곳에서 알을 낳았다. 그리고 태어난 새끼들과 행복하게 알콩달콩 사는 줄 알았는데... 알을 낳고 다들 장렬히 전사한다는 슬픈 결말. 어쩌면 생을 이어가는 모든 것들은 이렇듯 슬픈 결말을 운명처럼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4호선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4호선 근처에 직장을 구하고 2호선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2호선 주변에 있는 회사를 다니면 될 텐데 삶은 어찌하여 뜻대로 되지 않는가. 내 맘처럼 쉽게 되지 않는 게 인생이라지만 이렇게 매일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출퇴근을 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지, 부디 전사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려면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왜 모든 사람들이 일을 하기 위해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모여야 하는 걸까? 인간이 고안한 제도가 오히려 사고와 행동을 제한해 무한한 가능성을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닐까?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는 말했다. "인간성이 위협받는 것 같을 때마다 나는 늘 신화 속 페르세우스처럼 다른 공간으로 날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이성적 세계나 꿈속으로 도망치자는 말이 아니라 접근 방식을 달리 하자는 뜻이다. 과거와 다른 시각, 다른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고 새로운 방법으로 인식과 검증에 나서는 것이다." 

  

그래, 출퇴근 지하철을 아예 타지 않는 삶!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일을 하고 살아갈 자유! 디지털 노매드! 네 글자로 말하면 프리랜서! 두 글자로 말하면 백수! 사람이 팔 하나 움직이기도 힘든 만원 지옥철에 밤낮으로 시달리다 보면 심신이 피폐해져서 급기야는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말인데 현재 상황을 회피할 수단으로 뜬금 재기 발랄하고 기상천외한 생각이 떠오르면 혹시 내가 지금 몹시 피곤한 상태는 아닌지 몸과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인생을 탓하기에 앞서, 사고를 전환하기에 앞서, 사표를 내기에 앞서, 현실적인 시스템을 개선하는 일이 먼저였을 테다. 지하철 환승구조 개선, 역사 증축, 나아가 더 많은 지하철 노선 건설 추진...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면 차선책도 있다. 택시로 출퇴근, 자전거로 출퇴근, 걸어서 출퇴근, 회사 가까운 곳으로 이사, 집에서 가까운 회사로 이직... 이건 상상만 해도 경제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너어어어어무나 피곤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제는 정말로 다른 삶의 에너지와 너어어어어무나 만나고 싶었다. 신화 속 페르세우스처럼 다른 공간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출퇴근? 그것이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책은 도끼다!


빠삐용? 이건 문학이 아니라 "교육" 자료로 분리해야지. 안 그래?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수감자들이 도서관에 새로 들어온 책들을 정리하면서 나누는 대화다. 그렇다면 쇼생크 탈출은 퇴준생들에게 교육 자료가 될 수 있다. 나에겐 그랬다. 나는 기상천외한 생각이 떠오른다고 다음날 바로 실행에 옮기는 추진력과 용기를 겸비한 사람은 못되기에 교육 자료를 보며 공부를 하기로 했다.


영화는 스티븐 킹의 단편 소설을 각색한 것으로, 아내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선고받아 쇼생크 교도소에 수감된 한 남자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20년 만에 탈출하는 내용이다. 주인공이 악랄한 교도소장을 착실하게 물 먹이며 천둥 치고 비 오는 어느 날 밤 드디어 탈옥을 감행할 때 어찌나 짜릿했던지. 성공했을 땐 또 얼마나 흥분이 가시지 않던지. 아니, 회사가 무슨 감옥도 아니고 누명을 쓰고 일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토록 감정이입을 하고 있나. 돌아보면 선택은 늘 내 손안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스스로의 힘으론 벗어날 수 없는 감옥에 갇힌 무기징역수처럼 굴었다. 영화를 한 세번즘 보았을까, 식당개 3년이면 라면 끓이고 횟집 고양이 3년이면 매운탕 끓인다고, 나도 주인공을 따라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탈옥을 위해 주인공은 다음과 같은 준비를 한다. 바지 주머니에 몰래 작은 돌멩이를 숨겨와 매일 밤 돌을 깎아 작은 끌망치를 조각한다. 그 조그만 망치로 또 매일 밤 몰래 벽에 조금씩 구멍을 파기 시작한다. 한편, 전직 은행원이었기에 교도소장의 불법 세금 포탈을 도와주며 검은돈을 관리해주게 된다. 결국 그는 소장의 뒤통수를 칠 장부를 빼돌려 한밤중에 자신의 방 벽에 수년간 뚫어 온 구멍을 통해 탈옥에 성공한다. 감옥도 아닌 제 발로 있는 회사 벽에 구멍을 낼 수도 없고, 빼돌릴 장부도 없는데(있다한들 금융에 젬병인 나는 써먹지도 못하리라) 그럼 나는 백수가 되기 위해, 백수로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첫 번째 서바이벌 키트. 주인공은 교도소 안에서 어떻게 들키지 않고 끌망치를 가지고 있을 수 있었을까? 답은 바로 책 속에 있었다. 성경책 안에 도끼 모양으로 홈을 판 다음 끌망치를 책 속에 보관했던 것이다. 역시, 책은 도끼다! 카프카는 말한다.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나는 <책은 도끼다>를 포함하여 도끼가 되어 내 안의 장벽들을 와장창 깨어 줄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책을 통해 회사가 아니라도 잘 살아갈 수 있는 나 자신을 만드는 지혜, 자본주의가 나아가는 방향에 맞서 내 속도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 좋아하는 일을 지속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힘, 그렇게 살 수 있다는 믿음, 을 얻길 바랬다. 책은 세상의 커다란 벽과 마주할 때 그 벽에 구멍을 뚫는 도구가 되어주었다. 매일 밤 나는 나만의 구멍을 천천히 조금씩 파기 시작했다.


두 번째 서바이벌 키트. 주인공이 교도소장의 검은돈 세탁을 위해 세금 계산을(나중에 빼돌릴 계산까지) 할 때 나는 최저생계비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관리비, 통신비, 교통비, 식비, 잡비, 한 달에 최소한 얼마가 있으면 살아갈 수 있나 계산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며 살아보니 줄여야 할 그리고 줄일 수 있는 항목이 보였다. 돈은 중요하다. 돈이 있다고 지혜와 용기와 힘과 믿음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돈이 있으면 훨씬 쉽게 생긴다. 돈을 통해 원하는 것이 아닌 필요한 것에 돈을 쓰는 지혜, 고정적인 월급 없이도 불안해하지 않을 용기, 적게 일하고 적게 벌어도 잘 살아갈 수 있는 힘, 그렇게 살 수 있다는 믿음, 을 얻길 바랬다. 그렇게 돈 공부를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즐겁게 살되 내일 죽지 않을 걸 대비하기 위해 비축도 해가면서.     



교도소장을 크게 물 먹이고 탈출에 성공한 주인공은 늘 말하던 멕시코의 푸른 바다가 있는 곳, 지오타네오로 떠난다. 근무 마지막 날, 나는 회사 동료들에게 물을 먹이는 대신 커피를 먹였다. 모두들 아무 계획 없이 떠나는 나를 축하해주었다. 오랜 시간 동안 내게 친구가 되어주고 힘이 되어준 고마운 존재들이 많았다. 그런 면에서 나는 운이 참 좋았다. 이제 나는 내가 늘 바라던 일상으로, 나만의 방으로 돌아왔다.    




인생은 아이러니하다. 퇴사를 하고 두 달 후 내가 사는 동네에 드디어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이제 마을버스를 타지 않아도 되고 4호선과 2호선도 타지 않아도 된다. 외출을 했다가 나침반 없이도 척척 알아서 집으로 향하는 길, 오늘 저녁엔 연어 구이라도 해볼까. 아니면 훈제연어를 넣은 달걀말이를 할까. 참, 앞으로 연어를 먹을 때는 연어에게 꼬옥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고 먹도록 해야겠다. 네 인생이 그렇게 파란만장한줄 몰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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