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선배님의 말
퇴사한 다음날 아침. 간밤의 퇴사 축하 음주로 인한 숙취로 침대에서 미적거리고 있는데 동네 도서관에서 문자가 왔다. 예약한 책이 도착했으니 신속히 대출해가라는. 책 제목은 <퇴사하겠습니다>. sbs스페셜에 나온 그녀를 보고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신청해둔 책이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목표와 나의 목표가 같았기에 이 정도면 백수 선배님으로 모시고 그녀의 말을 경청해도 좋을 듯싶었다.
다른 회사에 들어가지 않고
죽을 때까지 살아보는 게 제 목표예요.
이나가키 에미코. 53세. 28년간 잘 다니던 회사를 스스로 그만둔 아프로헤어를 한 자유인. 미니멀리스트. 전직 아사히신문 편집위원이자 칼럼니스트.
이 정도면 회사, 다닐 만큼 다닌 거 아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퇴사란 현재의 상황, 돈, 나이, 성별, 국적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막연하고 두렵고 불안한 일이다. 회사를 오래 다니면 모아놓은 돈이 많을 거라는 건 사람들이 하는 큰 착각 중 하나이다. 물론 열심히 차곡차곡 모으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아무튼 오래 직장생활을 해본 사람이 말하는 '회사'와 '퇴사' 그리고 ‘그 이후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귀 기울여 들어봄직했다. 말이 아니라 구체적 삶이 그 내용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회사를 찬양하지도 그렇다고 퇴사를 부추기지도 않았다. 그저 조곤조곤 말하고 있었다. 회사와 일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 이를테면,
"회사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적당히 좋아하면 됩니다."
"회사는 나를 만들어가는 곳이지 내가 의존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자기가 만족할 수 있는 일과 돈을 많이 쓰는 일은 별로 그렇게 관계가 없어요. 그걸 꿰뚫어 보고 알아차리는 것이 언제든지 회사를 그만둘 수 있는 나로 만드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해요. 마지막 순간, 회사에 '고마워'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퇴사를 결심한 순간, 회사가 오히려 재미있어졌고 회사를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이 달라졌다고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즐겁게 일하며 최선을 다해 오랫동안 '퇴사를' 준비했다고 한다. 다름 아닌 퇴사 이후에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자신을 만드는 일을 말이다.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모두 언젠가는 싫든 좋든 '퇴사'라는 두 글자와 마주하게 되는 날이 온다. 용기가 있건 없건 언젠가는 나와서 자기 삶을 시작해야 한다. 때가 되면 스스로 멈춰 서야만 한다. 나 역시 일단 멈춰 섰다. 오래 다닌 직장이지만 그만둔다고 하니 동료들이 내게 용기 있다고 한다. 용기? 글쎄.. 그런 거 없어. 별다른 계획도 없는걸. 그랬더니 더 용기 있단다. 용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었을 뿐이다. 그동안 두려움과 불안함에 가려 그렇게 원했지만 쉽사리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던 '시간'이란 녀석에게 금메달을 걸어주었을 뿐이다. 하나를 얻으려면 다른 하나는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했을 뿐이다.
회사원이건 프리랜서이건 백수이건 돈이 있든 없든 누구에게나 다가올 미래와 이후의 삶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은 그냥 디폴트로 껴안고 간다. 물질로부터의 자유,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월급으로부터의 자유를 지향한다는 그녀 역시도 마찬가지이고. 삶의 우선순위에 그때그때 무엇을 들여놓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일단 경험하고 질문하고 다시 행동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백수가 된다는 건 구경하는 것 보다 춤추는 일이고,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일인 듯싶다. 과거의 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고, 무엇으로부터 달아나는 게 아니라 무엇을 향해가는 거라고 생각한다.
백수 선배님의 말에 백수 후배가 사족을 좀 붙여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