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하지 않은 미식가
"상대방이 힘이 세다고 겁먹을 필요 없어. 오히려 그 힘을 이용하면 된단다."
여자 레슬링을 다룬 인도영화 <당갈>에서 코치인 아빠가 딸에게 말한다. 시합에 나간 딸은 무지막지한 힘으로 공격해오는 상대방 선수가 되려 자기 힘에 의해 내리 꽂히도록 하는 멋진 기술을 구사한다. 그렇다면 나도 한번.....? 더위야 이토록 사정없이 내리쬘 거면 좋아, 너의 그 빛, 열기, 어디 한번 이용해볼까! 여름은 채소의 계절. 동네 시장에서 단호박 천 원, 가지 5개에 2천 원, 방울토마토 2천 원어치를 샀더니 아주머니께서 덤으로 두어 주먹을 더 넣어 주셨다. 토마토는 씻어서 그냥 집어 먹기도 하고 샐러드를 만들어서 먹고 그러고도 남아서 반으로 자른 다음 하나씩 쟁반에 놓고는 햇빛이 내리쬐는 베란다의 빨래 건조대에 올려 두었다. 이거야말로 친환경 오븐이 아니고 무엇이랴! 폭염이 이틀 동안 반 이상 조리해준 썬드라이토마토는 한여름 태양을 가득 머금고 말랑하면서도 쫀쫀하고 달콤하게 태닝 되었다. 세상에 어쩜 이렇게 맛있을 수가!
달궈진 프라이팬에 햇빛에 잘 말려진 토마토와 가지 그리고 단호박을 넣고 버터에 볶다가 삶은 파스타 면과 함께 섞어주고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다. Just want 10 minutes 내 것이 되는 시간~ 노래를 부르는 동안 요리는 끝이 난다. 만드는 데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다. 남은 재료에는 발사믹 식초를 뿌리고 샐러드로 변신시켜 요가 가기 전 저녁 식사로 미리 만들어 둔다. 5천 원으로 점심과 저녁을 한방에 해결하다니! 여름 채소인 토마토와 가지만 있으면 맛있고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요리가 정말로 무궁무진하다. 여기에 카레 가루를 넣으면 일본식 카레가 되고, 양파를 더하고 올리브유를 넣어 졸이면 프랑스식 라따뚜이가 되고, 가지를 구워 양파와 토마토에 절이면 중동식 샐러드가 되고, 토마토소스를 만들어 가지에 바르고 층층이 쌓아 익히면 이탈리아식 라자냐가 되고... 정말이지 끝도 없다. 심지어 맛도 있다! 정신승리나 자기 합리화가 아니다. 요리를 잘해서도 아니다. 그저 내 취향대로 내가 만들었기에 내 입에는 핵꿀맛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걸 좋아하고 진정으로 즐기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회사 다닐 땐 퇴사하고 백수가 되면 굶어 죽지는 않을까 내심 고민이 됐었다. 돈에 관한 한 여전히 고민이 도사리고 있지만 굶어 죽는 문제는 사실 단단히 작정하지 않으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오히려 직장에서 업무로 너무 바빠 끼니를 건너뛴 적이 있으면 모를까 백수가 되고 나서는 바빠서 밥을 못 먹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간단한 재료로 할 수 있는 요리가 차고 넘친다 걸 알게 된다면 말이다. 게다가 제철 채소는 가격도 무지 싸다. 이런 것들로 요리를 만들어 먹고 있다 보면 인생, 뭐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묘한 자신감마저 생긴다. 굶어 죽기가 이렇게나 어렵습니다. 빨래 건조대 위에서 햇볕에 익어가는 토마토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그래도 친한 회사 동료들과 수다 꽃을 피우며 함께 점심을 먹거나 퇴근 후 치킨을 저녁 삼아 맥주잔을 기울이던 순간들이 가끔씩 그립기는 하다. 백수로 집에 있다 보니 약속이 없는 한 자연스레 혼자 밥을 먹는 횟수가 많아졌다. 최근에는 재택 알바를 하고 있어 역시나 혼밥을 하는 중이다. 고독하지 않냐고? 사실 고독할 틈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날 먹을 점심과 저녁 메뉴를 미리 구상하고 준비를 한다. 점심시간은 12시에서 1시. 만들고 먹고 치우기까지 하려면 꽤나 바쁘다. 또 월수금요일엔 저녁 7시 반에 시작하는 요가 수업에 가야 하기 때문에 저녁을 일찍 챙겨 먹어야 해서 마음이 급해진다. 그렇다고 대충 먹진 않는다. 얼마나 소중하고 좋아하는 식사시간인데! 혼자 먹는다고 아무렇게나 차리지도 않는다. 냉장고 속 몇 가지의 간단한 재료로 만드는 소박하고 단출한 밥상이지만 마치 식당에 온 손님에게 대접하듯 나를 위해 정성스레 만들고 세팅한다.
파스타라든가 샐러드라든가 카레라든가 아무튼 접시 하나에 음식을 담는 한 그릇 음식을 주로 만들어 먹는데 맛도 있지만 설거지를 줄이는 효과도 있다. 음식을 담을 때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더라도 나름 신경을 쓴다. 너무 넘치지 않게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게. 야채의 색깔도 봐가며 초록색, 빨간색, 노란색 골고루 배치한다. 플레이팅이 끝나면 테이블 위에 냅킨을 깔고 그 위에 접시를 살포시 올려놓는다. 마지막으로 음식에 어울리는 음악을 선곡하면 비로소 나만을 위한 식사가 완성된다. 잘 먹겠습니다~!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상처럼 음식 앞에서 나는 한없이 행복해진다. 적어도 내 입맛에는 맞기에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다.
나의 요리는 특별하되 특별한 요리는 아니다. 냄비에 올리브 오일을 두르고 토마토와 가지 그리고 양파를 켜켜이 쌓아 넣고 익히거나, 그 재료 그대로 카레와 코코넛 밀크를 넣어 태국식 그린 카레를 만들기도 하고 양배추를 볶아서 계란에 부쳐낸 오코노미야끼 등 화려한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요리들이 대부분인데 매일 먹어도 어째 질리지가 않는다. 이런 집밥 덕분에 일상이 더욱 즐겁고 가벼워진다. 찾아보면 별것 아닌 재료로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는 레시피가 사방에 넘쳐나고 집 앞 시장에 가면 언제든 값싸고 싱싱한 제철 채소가 풍성하다. 이렇게 삼시 세끼를 준비할라치면 정말로 아닌 게 아니라 고독할 틈이 없다. 불안감에게 내어줄 자리가 조금은 줄어든다. 음식에 대한 호기심과 시간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어쩌면 백수가 되려는 사람에게 필요한 조건 중 하나는 당신은 과연 고독하지 않은 집밥 미식가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