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ordinary lif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트바리 Jan 09. 2020

트라우마를 이겨낸다는 것은 -상-

내 스스로가 만든 상처의 흉터



초등학교 때 내겐 친구가 많지 않았다.

소극적이고, 때때로 알 수 없는 이유로 다혈질이었던 내게 다가올 친구들은 많을 리 없었다.

매사 부정적이기까지 하니 누가 다가올 수 있겠는가. 지금의 내가 봐도 다가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원래 그런 성격은 아니었다. 잘 돌아가던 톱니바퀴의 부품이 갑작스럽게 떨어져 나가듯이

어떤 한 사건으로 인해 모든 것이 망가진 것만 같았다. 무려 10년 넘게 말이다.


내게는 너무나 이기기 힘든 싸움이었다.



1996년, 신도시 열풍이 불었을 때 우리 집도 그 열풍을 타고 단칸방을 전전하다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때 당시에는 복도식 아파트가 지어질 때라서 옆에 이웃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던 시절이었다.

엄마들끼리는 부녀회라는 이름의 모임으로 똘똘 뭉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이들끼리도 친해질 수 있었다.


그와 친하게 지낸 것도 그때 즈음이었다. 나와 함께 에너지가 넘치게 놀았던 그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넘치는 에너지 덕에 가끔 사고를 치긴 했지만 말이다. 옆집에 사는 이웃, 부모님끼리 친한 사이. 동갑내기. 같은 반. 정말이지 친해질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너무 가까우면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하던가.


그는 부모님과 자주 싸우곤 했다. 장소를 가리지 않아 때때로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쯧쯧, 지 엄마한테 하는 게 아주 버릇이 없구만." 같은. 나는 정말 친한 친구이다 보니 그렇게 손가락질당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나는 친구에게 쓴소리를 해댔다. 더 이상 친구를 사람들의 입방아의 대상으로 두고 싶지 않아서. 그는 그때부터 나에게 거리를 두었다. 더 이상 얼굴 보기는 힘들었다.


얼마 후, 친구는 이사를 간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싸운 채로 서로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 채로 헤어졌다.

2~3년 정도가 지났을까. 엄마를 통해서 연락이 왔다. 서울에서 살고 있고, 한 번 놀러 올 테니 나를 데리고 잠시 식사라도 하고 싶다고. 비가 오는 날, 우산을 같이 쓰고 차로 가면서 서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장난을 치며 밥을 먹었다.


그런데,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다.


사고가 나버렸고, 나는 친구와 그 가족 전부를 잃어버렸다. 이후로 가끔 꿈에도 나왔고, 용케도 살아난 나를 스스로 원망하기도 했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완전히 바뀌었다. 살아 숨 쉬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피폐해져 가는 날들에 대한 피로감도 컸다.


365일. 24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비가 오는 날만 되면 슬퍼졌고, 그런 기분은 원래의 내 것이었던 것처럼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이상한 생각에 휩싸여 걷다가 차에 치일 뻔하기도 했고, 하늘을 보며 그냥 울었던 날도 있었다. 이 증상은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희미해진 것 같다가도 비만 오면 다시 선명해졌다.


벗어나고 싶었지만 시도할 수 없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열심히 난 즐겁게 살고 있었고, 재밌는 인생이라 자부했지만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올 뿐이었다.

계속 제자리에서 머무는 난 악몽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행복에 대한 기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