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ordinary lif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트바리 Jan 09. 2020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것은 -하-

관계를 상실했을 때 비로소 나는 나아가는 것 같았다.

지독한 악몽에서 벗어나 보니 다시 그 중심에 서 있는다는 건 지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빨리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다 보면 결국 늪처럼 빠지는 모양새가 됐다.



화질이 좋지 않지만 2007년도 연습실에서 풋웍 중

그래서 그냥 지친 나머지 벗어나는 것을 포기하고 나를 위한 삶을 살기로 마음먹고 많은 것에 매진했다.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것을 피하고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적어도 이렇게 살면 괜찮아지겠지라는 생각으로 정말 바쁘게 살았다.


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수업을 듣고 나서는 아르바이트를 했고,

주말이 시작되자마자 오전에 아르바이트. 오후에는 저녁 늦게까지 비보잉을 배웠다.


24시간, 7일을 쪼개 쓰면서 여러 활동들도 빼먹지 않고 참여했다. 매일 학교에 가는 전철에서 쓰러져 자고, 일하고 집에서 다시 쓰러져 잤다. 그리고 주말에는 바쁜 사람들 틈을 헤쳐 다니며 일했고, 다시 몸을 울릴 정도로 강한 베이스와 킥, 드럼으로 가득 찬 음악에 춤을 배웠다. 몸은 지쳤지만 다른 생각들은 떠오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왜 생각나지 않았을까.


아마 그동안 나는 11살 때의 모습에 집착했을지도 모른다.

11살 때 나 자신이 그 상황을 책임지려고 했지만 책임을 논할 일이 아니었기에 더욱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당연히 현재의 내 모습과는 괴리 차이가 더욱 심하게 났으니까.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애써 떠올릴 필요는 없었기에 나는 그렇게 쭉 살았다.

여전히 비는 싫어했지만 두렵지 않았고, 가끔 감정의 파도가 밀려와도 마치 파도처럼 금방 부서져 사라졌다.


지금의 나는 어디 즈음일까.

사실, 내가 어디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노르웨이안 숲'에서 찾아 헤맸던

'나는 지금 어딨는가'와는 의미가 달랐다. 아니,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 주인공인 '와타나베'와 나는 둘 다 관계의 상실을 통해 새롭게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니까.


깊은 폐터널을 지나 다시 새로운 도로를 만난 것처럼 지금 나는 정말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11살에 멈춰있을 그도 어디선가 분명 행복하게 사는 나를 보고 웃어주고 있을 테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트라우마를 이겨낸다는 것은 -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