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당신이 싫다"고 말하는 법
어느 늦은 밤 폰이 울립니다. 발신자는? 낯익은 번호,
어떻게 할까요? 한 번 두 번이 아니라 매번 이런다면 말이지요.
나는 이 사람에게 "나는 당신이 싫다"라고 말하면서, 다시는 이런 식으로 연락하지 말라고 명토박을 수 없을까요? 이 나쁜 만남을 여기서 끝낼 수는 없을까요? 그 방법을 같이 생각해 볼까요?
아무리 좋은 방법이라도 이런 경우에는 우선은 멘탈을 강화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싫다'고 말하려면 자신의 멘탈부터 그 말을 견뎌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거울을 보고 말해 봅시다. 최대한 거만한 표정으로 '나는 당신이 싫다.'
이렇게 하면 그 말을 듣는 상대방의 기분을 정말 즉각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거울을 통해 전해지는 그 분노의 감정을 스스로 견딜 수 있게 될 때까지 반복해 보시죠. 처음에는 웃기다가, 심각해지다가, 아프다가, 덤덤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그 덤덤한 기분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말해 봅시다. 그게 바로 당신이 '그'에게 해야할 말의 톤과 뉘앙스가 되겠지요.
그러나 이런 연습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어떤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바로 본인의 '마음'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내가 왜 이 사람에게 시달려야 하나' 또는 '난 왜 이렇게 이 사람과 떨어지려고 이 고생인가?'라는 의문입니다.
이런 걸 예상이라도 했는지 철학자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좋은 만남은 기쁜 감정을 유발하고, 나쁜 만남은 슬픈 감정을 유발한다.
스피노자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나쁜 만남을 피하는 이유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슬픔은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는 것, 즉 적극적인 행위의 힘을 억제시키는 감정이라고 합니다. 반면 기쁨은 그 힘을 강화하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우리가 실연이라는 슬픈 감정에 휩싸여 있다면, 그 감정으로 인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나날들을 보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니면 해야할 일이 아니라 엉뚱한 일에 관심을 돌리면서 그(녀)를 잊으려고 하거나 다시 결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에 시달리지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슬픔을 떠나 기쁨을 가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로 인한 슬픔으로 부터 벗어나 내 일을 하기 위한 기쁜 감정이 절실해지는 것이지요. 즉 '나' 아니 모든 인간은 자신의 감정 안으로 유폐된 소극적 상태를 벗어나 자신의 힘을 적극적으로, 외부로 펼치기 위해서는 감정의 기쁜 상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슬픈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기쁨이 있다는 말이기도 해요. 왜냐하면 어떤 막대한 슬픔, 이를테면 부모나 지인의 죽음 앞에서도 우리는 산 자로서, 자신의 적극적 힘을 발휘하기 위해 웃어야 하고, 또 그 죽음으로부터 오는 슬픈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에게 기쁨의 최소치를 주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나는 거울 앞에 서서 그렇게 외치는 것이지요. 조금은 웃기지만, 그 웃음이 지금의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힘이 될 겁니다.
만약 그 조그마한 힘을 회복했다면,
슬픔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는 슬픔의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같은 스피노자의 말입니다. 즉 소극적 감정이 적극적인 감정인 기쁨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기쁨과 그로부터 추진력을 얻는 우리 지성의 활동이 이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성은 혼자서 움직이지 않아요. 그것은 늘 상상력과 함께 움직이지요. 여기 또 한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상상력이란 지성의 올바른 판단을 이끌어내는데 조력하기도 하지만, 온갖 허황된 망상의 근원이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 허황된 망상으로부터는 벗어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울을 보고 연습하고, 또 자그마하지만 적극적인 힘을 회복해가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 영혼은 최소한 안정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망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덤덤하게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이 어느정도는 지속될 것 같습니다.
이런 시간에 떠올려야 합니다. 그(녀)와의 일들을 말이지요. 슬픈 감정이 헛된 망상을 일으키지 않은 그 이미지들을 말입니다. 그러면 '원인'이 보이게 될 겁니다.
그리고 '원인'이 보이면, 그 원인이 얼마나 작은 일이었고, 그 작은 일이 얼마나, 어떤 과정에서 커졌으며, 어떤 '순간'에 나로하여금 '혐오'의 감정을 일으켰는지 명석하게 떠오르는 것이지요.
때로는 명석하긴 하지만 분명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대개 내가 아는 정보와 모르는 정보가 혼재되어 판단하기 곤란한 경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럴 경우에는 모르는 정보를 알기 위해 이것저것 찾아볼 필요도 있을 겁니다. 그래도 모르겠으면? 이 평온한 시간을 좀 늘여 보세요. 아니면 조급해 하지말고 다른 시간대로 평온함을 좀 미루어 놓아도 됩니다.
우리는 이제 그에게 '나는 당신이 싫다'라고 할 수 있는 세 가지 마음의 준비가 된 겁니다.
남은 것은? 바로 폰을 드는 것, 번호를 누르는 것, 그리고 약속을 잡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우리를 이끄는 것은 감정과 지성에 더해 '의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