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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Feb 12. 2024

모르는 동네에서 고독하게 단풍 구경하기

10월 26일

연휴 잘 보내셨나요?

저는 짧게 여행을 하고 돌아왔고, 스케줄 관리를 한다고 했는데 죄송하게도 업로드일을 못 맞췄습니다. 막바지로 달려갈수록 더 열심히 올려야 하는데, 마음 다잡고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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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차 낸 목요일.

그리고 내 생일 전날.


생일은 친구와 떠들썩하게 보내기로 했으니, 오늘은 다운타운에서 무계획으로 편안하게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녀볼까나. 아침으로 동네 마트인 타깃(Target)에서 사 온 것들을 먹으며 생각했다.


스타벅스에서 모닝 메뉴로 먹고 반한 '에그바이츠(Egg Bites)'. 달걀흰자, 코티지치즈, 시금치를 넣은 비슷한 음식이 있길래 사봤는데, 마트 버전은 맛이 별로였다. 스타벅스에서 사 먹었을 땐 이렇게 비리지 않았는데...


오전 시간을 여유롭게 즐기고 싶어 그 길로 스타벅스에 갔다. 주문하려는데 카운터 맞은편에 커다란 호박이 놓여 있었다. 슥슥 만지고 통통 두드려보니 진짜 호박 맞네. 희한하게 핼러윈을 기념하는 이곳. '브루드 커피(Brewed Coffee)'에 집에서 챙겨 온 인썸니아(Insomnia) 쿠키를 먹었다. 노트북을 펴놓고 지나온 일정도 정리하고 블로그도 썼다. 일하거나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노닥거리는 거, 너무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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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오늘의 일정을 고민하다, 다운타운에 있는 박물관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홈페이지에서 30달러 주고 티켓도 샀다. 그렇게 지상철까지 탔다.


그런데 환승역에 빨간 글씨의 입간판이 개찰구를 막고 있었다. 그 앞에서 사람들 몇몇이 역무원들과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 글씨는 'Out of Service'라 쓰여 있었다.


응? 갑자기 운행 정지라고? 구글맵엔 아무 얘기 없었는데요... 나도 역무원 한 명을 붙들고 무슨 일이냐 물었다. 무슨 경찰 활동 때문에 내가 타야 하는 레드라인만 오후에 운행을 안 한단다. 다른 루트를 찾아봤는데 두 시간 이상 걸린단다. 어쩔 수 없군.


터덜터덜 걸어서 타고 온 퍼플라인을 반대 플랫폼에서 기다렸다. 바로 집에 돌아가면 허무할 것 같아 종점까지 마냥 타고 있었다.



퍼플라인의 종점은 '린덴(Linden)'이란 역이었는데, 밖으로 나오니 정말 평화로운 동네를 마주했다. 가게는 거의 없었고, 크고 오래된 집들이 길을 따라 즐비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동네인데도 노후 보내기에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도는 넓고 깨끗한데, 걷는 사람이 나뿐이라 그림이나 영화 속에 뚝 떨어진 것 같았다. 일단 더 걸어보자.


특별한 볼거리가 없어도 눈에 닿는 모든 풍경이 좋았다. 차도 없고 사람도 없고, 그저 조용했다. 새소리, 바람 소리, 가끔 개 짖는 소리만 들려 마음이 고요해졌다. 노래를 듣고 싶지도 않고, 휴대폰으로 뭘 하고 싶지도 않고, 아무 생각도 안 났다.


그렇게 40분쯤 걸었을까, 공원 입구에 다다랐다. 그제야 구글맵을 켰고, '길슨공원(Gilson Park)'임을 확인했다. 눈으로 리뷰를 훑어보니 해변과 붙어 있어 계절 관계없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명하단다. 그렇다면 들어가서 천천히 돌아봐야지.


낙엽이 소복이 깔린 곳에 덩그러니 벤치 하나가 있다. 너무 고요해서 그런지 벤치와 눈싸움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무처럼, 벤치처럼 우뚝 서 있다가 문득 이마에 빗방울이 느껴져서 위를 쳐다봤다. 비도 부슬부슬 내리고 바람도 점점 세게 불었다. 일기 예보 좀 확인할 걸, 이러니까 길에 사람이 없지.



평소엔 비 맞는 걸 싫어해 비 온다는 예보가 있는 날엔 경량 우산이라도 꼭 챙기는데, 여행 중엔 모든 면에서 관대해지고, 낙천적이 된다. 그러니 비 좀 맞아도 된다. 오늘은 걷고 걸어, 강 앞에 있는 '윌메트 항구(WILMETTE HARBOR)'까지 갔다. 요트 클래스를 듣거나 클럽 회원들이 모여 파티를 여는 곳이라고. 그래서인지 일반 항구와는 달리 선착장이 작고 깔끔하다.



또 강변을 따라 아래를 쭉 걷다 신기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회색이고, 화려하고, 윗부분이 돔 형태인 건축물의 정체는 '바하이'라는 종교의 예배당이란다. 전 세계에 여덟 개밖에 없는 예배당 중 하나라길래 특별하게 느껴졌다. 예배당의 디자인은 조금씩 다른데 아홉 개의 각으로 벽이 세워지고 위에 돔 형태의 지붕을 얹는 건 공통 양식이다. 안엔 벽부터 천장까지 이어진 화려한 프레임으로 꾸며져 있었다. 천장에는 아랍어로 기도문이 쓰여 있었다.



밖으로 나와 다른 동네로 향했다. 가정집의 정원들은 갖가지 핼러윈 소품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길 끝엔 '할리 클라크 맨션(Harley Clarke Mansion)'이라는, 한때는 가정집이었으나 지금은 빈 주택인 건물이 있었다. 어트랙션이라 할만한 건 없지만 오래된 건축 양식 때문인지 오다가다 사진 찍는 사람들이 보였다.


바로 옆엔 '라이트하우스 해변(Lighthouse Beach)'라는 팻말이 보였는데, 바다가 아니라 강인데도 해변이라 부르는 게 신기했다. 강이 만든 해변가는 정말 고요했다. 파도도 낮고, 물의 색도 연하고, 모래도 곱다. 사방이 조용하니 파도가 안 치는데도 물이 스르륵 오고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라이트하우스가 해변만 있는 건 아닌가 보다. 같은 이름으로 된 정원도 있었다. 봄여름엔 이름 모를 들꽃들이 잔뜩 핀다는데, 나는 낙엽과 단풍 든 나무들만 실컷 봤다. 이름에 대한 수수께끼는 곧 풀렸다. 자줏빛 지붕을 얹은 아이보리 건물, 그 뒤로 우뚝 솟은 등대까지. 등대가 영어로 '라이트하우스(Lighthouse)'라서 그렇구나.



왠지 등대로 여정의 마침표를 찍은 느낌이라 슬슬 집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다 커다란 단풍나무에 시선을 뺏겼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단풍잎들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지나가던 분이 말을 붙였다. 이 동네에서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나무라고, 특히 가을에 보면 너무 예쁘다고. 정말 그렇다고 맞장구쳤다. 나무에 달린 이파리도 예쁘고, 바닥에 깔린 낙엽도 알록달록한 카펫처럼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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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퍼플라인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견한 즐거움은 곱씹어볼수록 깊어졌다. 박물관은 못 갔지만, 그리고 입장료도 환불이 안 될지도 모르겠지만, 대신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나만의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 계획대로 풀릴 때의 뿌듯함과는 다른, 계획대로 안 풀려서 오히려 좋은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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