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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Feb 02. 2024

시카고 보타닉 가든에서 보낸 동화 같은 하루

10월 23일

시카고에서의 마지막 주가 시작됐다.

평소라면 반갑지 않은 월요일도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특별하게 느껴진다.

시간 가는 게 아깝다!


_

전날 밤부터 생각했다.

눈뜨면 트레이더 조에서 사 온 베이글이랑 요거트 먹어야지.


글루텐 프리 베이글에 마스카포네 치즈와 저당 딸기잼을 덕지덕지 발랐다. 베이글은 가을 시즌 한정인 호박맛이었는데, 호박보다는 시나몬향이 많이 났다. 전자레인지에 돌렸는데도 부드럽고 쫀득해서 진짜 맛있었다. 마스카포네 치즈는 요거트보다는 꾸덕하고 일반 치즈보다는 부드러워서 빵에 발라먹기 좋다.


우유맛이 진해 꿀이나 과일잼과 참 잘 어울린다. 슬프지만 친구가 아침에 나갈 준비하다 잼 유리병을 깼다. 유리가 양쪽으로 쩍 갈라지며 잼만 한 덩어리로 덩그러니 뭉쳐 있는 게 아까우면서도 웃겼다. 어쨌든, 그래서 마스카포네 치즈와 딸기잼의 조합은 이날 맛본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트레이더 조가 다 잘하는 건 아닌가 보다. 호박맛 요거트는 별로였다. 눈 감고 먹으면 플레인 요거트와 다를 바 없다. 호박맛이라면서요...



아침을 든든히 먹고 2층의 코워킹 스페이스에 내려가 오전 업무를 처리했다. 지독한 아침형 인간이라 아침 7시에 일을 시작해서 점심 즈음에 웬만한 일은 끝낼 수 있다는 게 참 좋다. 어디 세븐투포하는 회사 없나요. 아니다, 점심도 굶을 테니 세 시 퇴근하게 해 주시죠.


_

도시랑 자연 중 어디를 여행지로서 더 선호하냐 묻는다면, 재미없지만 반반이라 대답하겠다. 시카고는 이런 나를 만족시키는 도시다. 바다처럼 보이는 거대한 미시간 호와 숲처럼 보이는 공원이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날은 공원 중에서도 규모나 풍경 면에서 단연 돋보인다는 '시카고 보타닉 가든(Chicago Botanic Garden)'이 목적지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고 싶어 점심도 안 먹고 후다닥 나왔다. 대중교통으로 가긴 좀 멀지만, 버스로라도 가보지 뭐.


그동안은 기차나 지상(혹은 지하)철만 타고 다닌 터라, 버스를 타려니 살짝 설렜다. 그 설렘은 구글맵에 예정된 시간보다 버스가 15분 정도 늦어지며 깔끔히 사라졌다.


버스에 타서 애플워치를 카드 리더기에 댔는데 아무 응답이 없었다. 버스는 애플페이가 안 되는 건가? 나중에 알았는데, 미국에서 발급받은 카드와 연결되어 있어야만 애플페이가 가능하고, 외국인은 벤트라(Ventra) 교통카드를 따로 발급받거나 현금을 내야 한다. 기사님에게 사과하고 내리려는데 그냥 앉으라며 앞문을 닫았다.

긴 레게머리에 선글라스가 잘 어울리는 분이었다. 감사하다고 말한 뒤 우물쭈물하다 앞쪽 좌석에 앉았다. 친절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열심히 고개를 까닥거렸다.


착잡한 와중에 사진은 남겼다


40분 정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거의 종점까지 달려와서인지 승객이 나와 젠틀해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뿐이었다. 기사님에게 연신 감사를 표하고 하차했다.


입구에 있는 팻말 앞에서 사진을 찍는데, 승객이었던 할아버지께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베이지색 체크무늬 양복에 중절모를 쓰고, 한 손엔 검은색 캐리어 손잡이를 쥔 채로. 그러더니 캐리어를 끌고 내 쪽으로 점점 다가오는 거다.


나에게 관광객이냐며,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는 나에게 본인은 시카고 보타닉 가든 안에 있는 도서관에서 15년간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름은 마이클이요, 나이는 78세 생일을 며칠 앞둔 77세였다.


어떤 봉사를 하고 있냐 물으니 여기저기서 그림책을 기부받아 큐레이터로서 도서관에 진열하는 일이란다. 캐리어에도 그림책이 가득하단다.


도서관을 소개해주겠다는 마이클의 말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눈빛도 그렇고 느껴지는 기운이 너무 선했다. 큰길을 따라 도서관까지 동행하는 건 괜찮겠지.


그렇게 도서관에 가서 캐리어 안에 있던 그림책 무더기를 한 권씩 구경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저렴하게 사 왔다는 큐브형 그림책도 보고, 마이클이 부인과 주문 제작했다는 지구본도 한참 들여다봤다. 그들은 몇 년 전에 도서관에 지구본까지 기부했단다. 책과 소품을 차분한 말투로 하나하나 소개하는 마이클은 생기 넘쳤다.


마이클 부부의 이름이 쓰인 지구본


도서관에서 나와 본격적으로 정원을 구경해 보기로 했다. 마이클은 시카고 보타닉 가든은 엄청 넓으니 몇 군데만 골라서 보라고 조언했다. 그럼 추천해 달라고 말하니 도서관에서 멀지 않은 곳을 소개하고 싶으니 같이 가잔다.


그렇게 무릎 높이의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Dwarf Conifer Garden(난쟁이 침엽수 정원)'과 여름에 오면 훨씬 예쁘다는 'Japanese Garden(일본식 정원)'에서 단풍 든 나무들을 구경했다. 그리고는 다리를 건너 연못과 축 처진 나뭇잎들이 매력적인 언덕까지 산책하듯 천천히 걸었다.


Dwarf Conifer Garden
Japanese Garden


두 시간을 마이클과 동행했다. 그는 몇 년 전에 심장 수술을 받아 빨리 걸으면 숨이 차다고 했다. 그래서 엄청 천천히 걸으며 마이클이 살아온 얘기, 아내 얘기, 여행 얘기 등을 차례로 들었다. 내향적인 성격이라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게 편하지 않은데, 이상하게도 마이클과의 시간이 지루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마이클은 집까지 두 시간이 걸린다며 이만 가보겠단다. 나는 고맙다고, 조심히 가라고 인사했고, 그는 악수를 청했다. 내 손 크기의 두 배는 되는 것 같은 창백하지만 따뜻한 손이었다. 가벼워진 캐리어를 끌고 뒤돌아가는 마이클의 뒷모습을 보며 나중에 떠올리면 기분 좋아질 추억이 하나 생겼다는 생각에 기뻤다.


문득 점심도 안 먹고 한참을 걸어 다녔다는 게 떠올랐고, 이를 증명하듯 엄청 배가 고팠다. 방문자 센터에 있는 카페 겸 식당에서 멕시칸 랩을 사 먹었다. 야채와 치킨, 그리고 치즈 드레싱이 들어 있는 랩이었다.


배가 부르니 힘이 났고, 근처에 트레일이 있길래 무작정 길을 따라 걸었다. 한 시간을 넘게 트레일을 걷는 동안 사람은 한두 명 밖에 못 봤다. 아무리 눈이 즐거워도 인적 없는 곳은 무서워. 빠른 걸음으로 입구 쪽으로 돌아왔다.



자...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나 교통카드가 없잖아? 돈이 아깝지만 어쩔 수 없이 리프트나 우버를 부를 생각이었다.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우버를 호출하려는데 아무리 새로고침해도 주변에 차가 없다는 거다.


그러다 올 때 탄 버스와 같은 번호의 버스가 정류장에 섰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데 아까 본 그 레게머리 기사님인 거다! 고갯짓으로 인사를 건네는데 기사분이 타라고 손짓했다. 교통카드가 없어서 안 된다고 손사래를 쳤는데, 사람이 없으니 그냥 타란다.


그래서 그냥 탔다. 또 40분을 타고 돌아오며 오늘 받은 친절을 절대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꼭 배로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지.


_

야외 정원을 돌아다니는 내내 으슬으슬 춥더니 저녁엔 목이 칼칼했다. 기분 탓인지 열이 살짝 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도 잠에 드는 순간까지 기분이 좋았다. 허술한 여행자에게 순수한 호의를 베푸는 사람을 두 명이나 만난 날이라니. 복권은 이날 샀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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