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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Feb 09. 2024

건축으로 유명한 도시에서 내내 걸어 다니기

10월 25일

시카고에서 일하는 마지막 날이다.

10월 한 달 중 주말과 연차를 빼면 열흘 정도 일했다.


장기 여행이 낯설진 않지만, 타지에서 2주일간 회사일을 한 건 처음이라 여행 전부터 은근 긴장했다. 장소만 바뀌는 건데 뭐가 크게 다르겠어, 라며 의연한 척했지만 혹여나 권리만 취하고 의무를 소홀히 하는 사람이 될까, 그래서 누군가에게 일부 업무를 떠맡기게 될까 엄청 신경 쓰였다.


다행히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다른 팀원들이 그랬듯 나 역시 별일 없이 타지에서의 원격근무를 마무리했다. 마지막을 장식하듯, 이날은 시카고의 새벽 시간에 클라이언트 미팅이 잡혀 평소보다 일찍 일을 시작했다. 눈이 뻑뻑하고 어깨는 결렸지만, 점심 즈음에 노트북을 닫을 수 있었다.


이제 주말까지는 온전히 여행자로 살다 한국으로 돌아간다!


_

기분은 홀가분한데 몸은 무겁게 느껴지는 한낮의 여행자. 날이 흐리니 더 힘이 안 난다. 아무래도 밥으로 기력을 보충해야겠군...


친구가 지난주에 학교 사람들과 바비큐 파티를 하고 남은 고기가 있단다. 마침 친구집 건물 2층에 야외 바비큐장이 있는데, 점심부터 거하게 고기를 구워 먹기로 했다. 생각만으로 기력이 솟는다...!


바비큐 그릴 스위치를 켜고, 불을 붙이고, 호일을 깔고 고기를 올렸다. 뭐라도 도와야 하는데, 옆에서 걸리적거리기만 하는 것 같아 한발 떨어져서 친구가 필요한 게 있을 때마다 발 빠르게 움직였다. 친구도 중간고사다 취준이다 바쁠 텐데 여행 온 나를 배려해서 시간을 내주는 것 같아 고마웠다.


살짝 몽롱한 상태로 고기가 선홍빛에서 먹음직스럽게 노릇해지는 걸 구경했다. 두툼한 오겹살과 삼겹살이 나란히 익어간다. 친구가 적당히 익은 고기를 한 입 크기로 자를 때즈음, 테이블을 닦고 반찬을 하나씩 올렸다. 깻잎과 상추 대신 양상추를, 쌈장 대신 어설프게 섞은 고추장과 된장을 세팅했다.



집에서 밑반찬 여러 가지를 꺼내 먹는 것보다 왜 맛있지? 이게 캠핑의 매력인가. 비도 흩뿌리고 먹구름은 여전히 머리 위에 있었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와 열심히 먹었다. 두 시간 가까이 고기 파티를 즐기고 나선, 친구는 학교로 돌아가고 나는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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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전, 시카고 보타닉 가든에서 만난 마이클 할아버지가 그랬다. '시카고 건축 센터(Chicago Architecture Center)'에 안 가봤으면 꼭 가보라고. 어르신들 말씀은 들어서 나쁠 게 없지.


시카고 건축 센터는 시카고 강 바로 앞에 있는데, 이전에 방문한 미술관들보다는 작은 규모였다. 입장료도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성인 관광객 기준 14달러였는데, 입장권은 토큰처럼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었다.



센터 1층엔 시카고 갤러리와 기념품 숍이 있고, 2층엔 특별 전시 공간이 있다. 눈에 보이는 시카고 갤러리부터 구경해 봤다.


시카고 갤러리는 왜 시카고가 건축의 도시라 불리는지 알 수 있는 공간이었다. 입구 근처엔 시카고가 어떤 발전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건축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영상을 보여준다. 스크린 아래엔 시카고를 축소해 놓은 모형을 만들어놓고 다양한 색의 조명으로 비춘다.



그리고 공간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시카고가 혁신의 도시가 되기 위해 어떤 미션을 추구하는지 보여주는 스폿에서 걸음을 멈췄다. "일하는 곳에서 살고, 사는 곳에서 일하는 건 내가 사랑하는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이 문구에 시선을 빼앗겨버렸기 때문.



시카고는 확실히 디지털 노마드가 머무르기에 좋은 도시다.


대도시만큼의 인프라는 갖춰져 있는데, 공원과 문화 시설이 곳곳에 있다. 사람도 차도 많지만 이를 수용할 만큼 도시가 크다. 대중교통도 잘 되어 있고, 한 달간 지내보니 치안도 괜찮다. 물가는 눈물 나지만 미국 전체가 그렇기에 이건 어쩔 수 없지.


시카고는 앞으로 일하기에도, 살기에도 좋은 도시가 되기 위해 다양한 방향으로 노력한단다. 상업시설에 비효율적으로 쓰이는 공간이 있다면 코워킹 스페이스나 주거용 건물로 바꾸는 것도 구체적인 방법 중 하나다. 시카고 갤러리엔 이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목업이 있었다. 그 밖에도 현재 진행 중인, 그리고 예정된 건축 프로젝트들을 소개해놓은 구역도 있다.


2층으로 올라가 보니, 도시 속 자연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전시 두 개가 온고잉이었다. 하나는 'Recovered: Chicago's Urban Tree Canopy'라는 이름이었다. 시카고엔 공원이 많은데도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에 비하면 도시에 나무가 적은 편이란다. 그래서 여러 건축물을 새로 지으면서도 시카고는 나무 심기에도 열심이다.


또 다른 전시였던 'Reframed: The Future of Cities In Wood'. 앞의 전시가 도시 안의 나무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번엔 건축과 나무의 하나 됨을 이야기한다. 목재 건축물의 디자인적 아름다움과 환경에 미치는 순기능이 포인트였다. 긴 현수막을 곳곳에 내려놓고 건축 모형들로 현재와 미래의 건축 프로젝트들을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실재하는 건축물들이 아니라 그런지 크게 흥미롭지는 않았다.



다시 내려와서 기념품 숍을 마지막으로 둘러봤다. 공간에 비해 아이템 종류가 다양했다. 가방과 티셔츠는 어느 기념품 숍에든 다 있는데, 이곳은 시카고의 스카이라인을 적극 활용한 아이템들이 많았다. 살까 말까 고민했던 접시와 컵 받침, 그리고 시카고 관련 책들까지. 가격의 압박을 이길 만큼 갖고 싶은 아이템은 없어서 그냥 나왔다.



_

건축 센터를 나오니 시카고 강이 바로 앞이었다. 이 강을 따라 조성된 '시카고 리버워크(Chicago Riverwalk)'는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가 사랑하는 산책로다. 현지인들은 여기서 조깅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관광객들은 사진 찍고 구경하느라 정신없다. 나는 그래도 몇 번 와봤다고 이 중간이 되어 간간히 사진을 찍으며 천천히 산책을 즐겼다.



강변의 나무들에도 단풍이 들었다. 높은 건물들과, 천천히 흐르는 강과, 단풍 든 나무와, 흐린 하늘이 만든 풍경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트럼프 타워도 지나고 마켓도 지나 특이하게 생긴 건물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원반이 층층이 쌓인 듯한 형태의 건물은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주상복합이란다. 이름은 '마리나 타워(Marina Towers'인데, 직육면체 건물들 사이에서 특이한 원통형의 건물은 도드라졌다.



자주색의 다리를 건너 주거지역으로 향했다. 지도를 안 보고 무작정 걸어 다녔는데, 익숙한 간판이 보였다. 디저트 리뷰글에도 언급했던 '파이어케이크 도넛(Firecakes Donut)'이었다. 먹고 싶었던 도넛 두 개를 골라 집으로 포장해 왔다.


싹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책상 앞 의자가 아닌 바닥에 놓인 빈백에 털썩 앉아서 도넛을 야금야금 먹고 있으려니 긴장이 확 풀렸다. 여행지에서 느끼는 익숙함과 편안함은 일상에서의 그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반갑다. 이것도 한 달에서 일 년으로, 일 년에서 무기한으로 길어지면 또 다르겠지. 아무튼, 여행이 얼마 안 남은 나로서는 이 순간이 참 나른하고 기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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