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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Sep 25. 2021

인문학도를 움직이는 초록빛 과학 이야기

<지구 끝의 온실>을 읽고

주말마다 본가에 가면 꼭 하는 일이 있다. 바로 초록색 동생들이 목마르지 않게 양껏 물을 뿌려 주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몫이 된 건 할머니에게 더 이상 무거운 도자기 화분을 베란다로 옮길 힘이 없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분갈이를 하는 게 좋겠다며 몇 번이고 할머니에게 잔소리처럼 말했건만, 두 식물도 스무 살이 넘어 본인처럼 노쇠해졌을 거라며 분갈이를 극구 반대했다.


거실에 생기를 불어넣는 그 식물들에 할머니는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것으로 보답했다. 이번 주말의 '물 주기 루틴'이 평소와 달랐던 건 이파리와 가는 줄기 마디마다 물방울을 조롱조롱 매달고 있는 모습을 나도 꽤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는 거다. 그다지 예쁘지도, 개성 있지도 않은 이 두 식물은 더스트 폭풍 이후의 시대라면 살아남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추석 연휴에 붙들고 있던 <지구 끝의 온실>이 100년 후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데, 식물의 효용성은 "맛있거나 예쁘거나, 하다못해 약으로 쓸 수 있어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구절이 생각난 것이다.


2050년대 중반, '더스트 폴'이라 불리는 초대형 먼지 폭풍이 지구 곳곳을 덮친다. 대도시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돔을 씌우고, 로봇 병사들을 동원해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다. 반면, 배척당한 사람들은 여기저기를 오가며 방황하다 살아남기 위해 대안 공동체들을 만든다. 기계 정비사 지수와 식물학자 레이첼이 주축이 된 '프림 빌리지'도 그중 하나다. 마을의 평화는 더스트가 다시 몰려오며 깨진다. 레이첼이 개량한 식물 덕분에 더스트의 위기는 넘기지만, 침입자가 마을에 지른 산불로 결국 프림 빌리지의 구성원들은 흩어지고 만다.


시간이 흘러, 한국의 식물학자인 아영은 '모스바나'라는 덩굴 식물이 한 해양 도시를 뒤덮었다는 제보를 받고, 원인 파악을 위해 고군분투하다 프림 빌리지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는 과거에 프림 빌리지를 더스트로부터 지켜낸 식물이 바로 모스바나이며, 프림 빌리지의 구성원들이 몇십 년 전의 약속을 지키려 심은 모스바나가 지구 곳곳에 군락지를 이뤄 더스트 종식을 이끌었다는 진실을 발견하고 이를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


2050년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여러 국가들이 온실가스 순배출량이 '제로' 상태인 '탄소중립'을 이루겠다고 선언한 목표연도다. 과학자들은 중간 목표로 "2030년 탄소배출량을 2010년 대비 최소 45% 감축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지만, 유엔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2030년 탄소배출량은 2010년 대비 오히려 16% 증가할 전망이다.

* 참고 기사: 유엔 "이대로면 기후 대재앙 직면"…2050년 온도 2.7도↑


<지구 끝의 온실>의 세계관은 이 목표를 향해 질주하다 큰 사고가 나면서부터 시작된다. 미국의 한 연구소가 기후위기에 대처하는 방안을 연구하던 중 실수로 유해 물질을 유출시킨 것이다. 이 물질은 금세 대형 먼지 폭풍이 되어 지구를 멸망시켰다. 재건 후에는 과학자들이 힘을 모아 발명한 약품이 재난을 종식시켰다며 자축한다. 북 치고 장구 치는 듯한 인류의 모습을 한 발짝 떨어져 보고 있자니 부끄러움으로 손발이 저렸다.


재난 전후에는 인간의 가식적인 모습이 그려졌다면, 재난 중에는 극한 상황에서 극대화된 인간의 적나라한 본성 때문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한정된 물자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는 무리들, 사체들이 널린 폐허에서 뭐라도 쓸 것을 발굴하려는 사람들, 지수의 말처럼 "짧은 평화의 순간을 거쳐 갈등과 배신으로 파국을 맞는" 공동체들. 이 모든 것들이 더스트와는 또 다른, 어쩌면 더 위험한 먹구름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먹구름 사이로 비치는 은은한 빛들이 암흑 같은 시간을 견디게 한다. 영원한 공동체는 없다고 말하던 지수는 내일을 꿈꾸는 프림 빌리지 사람들의 에너지에 동화된다. 점점 나뿐만이 아닌, 마을 전체의 생명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뿔뿔이 흩어지고 나서도 프림 빌리지 사람들은 그리움과 슬픔을 식물에 꾹꾹 눌러 담아 곳곳에 심는다. 과거의 희망이 미래에 싹터 온 세계로 퍼져나간 걸 보며 부끄러움으로 물들었던 얼굴이 다른 감정으로 뜨거워졌다.


생존을 위한 투쟁도, 관계를 맺고 감정을 교류하는 것도 인간의 본능이다. 서로를 파멸의 길로 떠미는 인간의 모습은 지겹지만, 슬프고도 따뜻한 순간들을 경험하면 다시 인간을 믿어보고 싶어 진다. "인류는 존재 가치가 없다”라며 냉소적으로 단언하던 지수가 결국은 공동체의 마지막을 함께하며 리더 역할을 한 것처럼, 인간은 결코 인간을 온전히 미워할 수 없다.


나에게 <지구 끝의 온실>은 절망이 아닌 희망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늦었지만, 이미 지구에 크고 작은 무수한 상처를 남겼지만, 이제라도 수습하면 최악은 피할 수 있다는, 그런 희망 말이다. 어둠 속에서도 뜸부기 불처럼 발광하는 개개인이 모이면, 주변을 환히 비추는 커다란 빛이 될 거라고 되뇌며.

 

지구온난화의 원인은 오롯이 인간에게 있다고 한다. 2015년 파리협약에서는 2100년까지 지구 기온 상승이 산업화 이전보다 1.5도를 넘지 않도록 온실가스를 줄이자고 협의했다. 그런데 이미 1.2도나 상승했다. 더스트 폴과 같은 재앙을 경험하지 않으려면 당연히 국가나 기업에서도 친환경 방침을 내놓아야 하지만, 온실가스의 일부인 탄소배출은 일상생활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개인 차원에서도 인식과 행동 변화가 시급하다.

* 참고 기사: 탄소 감축 선언 잇따랐지만… 전세계 2030 온실가스 못 줄인다


<지구 끝의 온실>은 과학과 거리가 먼 인문학 전공생인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 메시지를 조곤조곤 전달한다. 미스터리인 듯 동화인 듯 흥미로운 사건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기후위기의 심각성과 인간 중심 사고의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이 생긴다.


책을 덮어도 이 생각은 머릿속에서 작은 불씨로 남아있다가 이따금씩 화르륵 타오른다. 그게 언제냐면, 초록빛 식물들을 볼 때다. 헤진 벽돌벽에 이리저리 몸을 늘어뜨리고 있는 모스바나를 닮은 담쟁이덩굴, 아스팔트 도로의 깨진 틈을 비집고 싹을 틔운 토끼풀, 그리고 우리 집의 정돈되지 않은 평범하디 평범한 화분들. 목소리도, 움직임도 없는 그들에게서 강한 생명력을 느끼고, 가만히 보고 있다 보면 어느새 레이첼의 모스바나가 내뿜던 은은한 푸른빛까지 보이는 것 같다.


프림 빌리지 사람들이 서로에게 한 약속을 몇십 년에 걸쳐 지켜냈듯, 스스로 한 소박한 약속을 잊지 말라고 속삭이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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