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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Nov 15. 2021

과거와 작별할 수 없지만 현재를 살아간다는 것

한강 작가의 최신작, <작별하지 않는다> 리뷰하기

벌써 몇 번째 시도인지 모르겠다. 계절이 바뀌었고, 열 장도 넘는 종이를 찢고 구겨버렸다.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작별하지 않는다>의 리뷰글을 쓰는 걸.


매번 가볍게라도 감상을 기록하리라, 하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가도 고개를 푹 숙이며 책을 덮었다. 감히 깊이조차 가늠할 수 없는 슬픔에 대해 어떻게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쓰겠어.


슬픔의 원인은 명확하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약 70년 전 섬 인구의 10분의 1인 3만 명이 희생당한 역사적 비극. 주인공 인선의 어머니인 정심은 이 사건으로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었다. 부모님과 여동생은 세상을 떠났고, 오빠는 행방불명됐다.


정심은 그 후 몇십 년 간 오빠의 유해라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머리가 하얗게 센 70대 노인이 될 때까지 그는 끈질기게 유족회원이 되어 위령제에 참여하고, 대구에 있는 광산에 정기적으로 다녀왔다. 인선과 또 다른 주인공인 경하는 정심이 간절함을 담아 꾹꾹 눌러쓴 기록물과 모아둔 자료를 보며 함께 조용히 아파한다.


사실 인선과 경하도 외롭고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다. 인선은 정심을 홀로 간병하다 과거에 대한 트라우마가 옮았다. 경하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소설을 쓰고 난 뒤 깨어 있을 때는 극심한 위경련과 편두통에, 어렵게 잠이 들면 악몽에 번갈아 시달렸다.


대학교 때부터 20년 넘게 친구였던 두 사람이 제주도에 있는 인선의 집에서 만난 건 폭설로 모든 교통편이 단절된 어느 겨울날이다. 목공 일을 하던 인선이 실수로 손가락 두 개가 잘려 서울의 한 병원에 실려왔다. 그는 경하에게 제주도 집에 두고 온 앵무새에게 밥과 물을 챙겨달라고 부탁한다. 당장 제주도행 비행기를 타고 가서. 눈보라를 헤치고 겨우 도착한 곳에는 이미 숨이 멎은 앵무새만이 새장 속에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동이 트면서 집 안에 약간의 온기가 돈다. 식탁에 엎드려 있던 경하의 맞은편에는 인선이 앉아 있고, 머리 위에는 앵무새가 날아다닌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경하는 스스로에게 거듭 묻는다. 병상에 누워 있을 인선이, 그리고 지난밤 경하가 직접 땅에 묻어준 앵무새가 눈앞에 존재하다니. 하지만 인선과 차를 마시고, 정심의 이야기를 나누고, 따뜻한 콩죽을 먹다 보니 꿈인지 생시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 누가 여기 함께 있나, 나는 생각했다.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하는, 관측하려는 찰나 한 곳에 고정되는 빛처럼.

진심으로 오랫동안 누군가를 생각하다 보면 상대방이 곁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작가는 이를 평행우주가 생성되는 것처럼 표현했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더라도 사랑으로 이어진 존재는 만날 수 있다. 설령 그 만남이 내 눈에만 보일지언정 고통을 보듬어주고 살아갈 힘을 보태준다면 그 자체로 소중하다.


리뷰글을 남겨야겠다고 다시 마음을 먹은 건, 이번에 책을 읽을 때는 절망 속에서도 희미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책의 결말부에는 경하와 인선이 집에서 나와 촛불을 들고 주변을 돌아다닌다. 양초가 다 타버리자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인다. 경하의 성냥 끝에서 불꽃이 솟아남과 동시에 약간의 해방감을 느꼈다. 숨을 참고 있다가 훅, 하고 내쉬는 것 같기도, 어둠 속에 오랫동안 갇혀 있다가 문을 빼꼼 연 것도 같았다.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작별하지 않는다>가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는 작가의 말이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된다. 사람을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 절뚝거리면서도 한 발짝씩 나아가게 하는 건 사랑인 것이다.


인선이 손가락 접합 수술을 받자마자 본인의 회복이 아닌 키우던 앵무새의 배고픔을 먼저 걱정했던 것. 경하가 앵무새를 돌보아달라는 친구의 부탁에 눈보라를 뚫고 제주도 산골 마을에 간 것. 그리고 정심을 비롯한 소중한 이들을 잃은 사람들이 관절이 시큰거리는 나이가 될 때까지 제주와 대구를 몇 번이고 오갔던 것. 그리움과 슬픔을 가슴에 꼭 묻은 채 그들은 사랑을 연료 삼아 차분히 매일을 살아갔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과거와 작별하지 못하는, 작별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등지지 않는 것, 그리고 잊지 않는 것. 내가 딛고 있는 이곳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시간적 단면에 쌓여 있는 수많은 과거의 결을 살펴보는 것. 눈물로 얼룩진 암흑의 결이 반복되지 않게, 잊지 않는다.


서울에도, 제주도에도 올해는 일찍 첫눈이 왔다. 힘없이 내리는 눈발을 보며 나는 인선과 경하를 생각했다. <작별하지 않는다>에는 거의 모든 장면에 눈이 날리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떠올리는 건 국숫집에서 밥을 먹고 나와 함께 첫눈을 맞는 둘의 모습이다.


함박눈이 내리면 어떤 생각을 할까. 시야가 흐려질 정도로 눈보라가 치는 날엔 또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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