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어느 날, 58세 엄마, 30대 초반 나, 6세 아들은 그렇게 각자의 배낭을 매기로 했다. 목적지는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다. 아직 군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준비할게 많았다. 가장 먼저 ' 멈춤'을 택해야 했다. 바로 '휴직'을 해야 했다. 막상 하려고 하니 너무 걸리는 게 많았다. 당시 나는 '2차 중대장'을 하고 있었다. '휴직'을 하더라도 보직을 마쳐야했다. 이제 ' 소령 진급'도 1년여밖에 남지 않았는데 굳이 ' 지금' 시점에서 해야 하나 하는 고민에 빠졌다.
사실 나는 매우 ' 욕심' 이 많다. 당연히 1차 진급에 대한 욕심도 많고 뭘 해도 잘해야 한다는 욕심, 1등 해야 한다는 욕심도 가득했다. 운동을 해도 다 잘해야 하고 외국어를 해도 그 집단에서 제일 잘해야 한다. 체력검정도 모두 특급에 신기록을 가져야 만족했다. 내 군생활의 커리어 자체도 평범한 게 싫었다.
나는 한국군과 미군 양쪽을 일찍 경험했다. 내 병과에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장 먼저 갔다. 자연스럽게 남들의 관심을 넘어 시기, 질투와 근거 없는 소문도 나돌았다. 어찌 보면 나의 군생활은 완벽함에 대한 집착이었다. 말나 오는 게 싫었다. 뭔가를 하면 내가 스스로 해야 직성이 풀렸다. 자연스럽게 남에게 위임을 하기보단 모든 것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군생활 10년 차를 앞두고 결국, 난 탈이 났다.
1. 건강이 나빠졌다
계속해서 살이 빠지고 머리가 아팠다. 병원에서 CT를 찍었더니 목디스크가 커졌다고 한다. 사실 몇 달 전에도 체력검정을 하러 가다 ' 버스'가 뒤집어졌다. 나는 맨 앞자리였는데 보조좌석에 있었다. 안전벨트가 없었고 새벽이라 자고 있었다. 그 버스 의자에서 난 튕겨져 나갔다. 당시 목에 상당한 충격이 있었지만 그 버스 사고가 확대되지 않기를 바랬다. 뼈가 부러진 게 아닌지라 몇 번 치료를 받고 방치했다. 그런데 목 상태가 점점 안 좋아졌던 것이다.
더불어 스트레스로 인한 신경성 장 과민증, 두통이 계속되었다. 당시 ' 음주문화'가 나에겐 정말 맞지 않았다. 업무를 하고 다음날 저녁부터 새벽까지 이어지는 ' 음주와 회식'은 술을 잘 못 마시는 나에겐 매우 힘들었다. '중대장'이란 직책 때문에 빠질 수도 없었다. 내가 주관을 해서 해야 하는 것도 많았다. 꽤나 스트레스였는데 그게 1년 반째 이어지고 있었다.
2. 손주를 돌보던 엄마의 건강이 나빠지고 있었다
엄마는 잘 다니던 직장을 나 때문에 그만두었다. 군생활을 하는 딸내미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모든 것을 접고 같이 살기 시작했다. 일 욕심이 많은 딸인지라 한번 출근하면 언제 집에 돌아올지 몰랐다. 덕분에 난 군에서도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었다. 6년을 본인 살림, 딸 살림살이를 하면서 손주를 돌보셨다. 점점 허리와 몸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완벽주의자, 예민한 성격의 엄마는 병이 났다. 병원에서는 좀 쉬라고 했다.
당시 엄마는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국내여행도 많이 가보지 못했다. 그런 엄마와 함께 여행이라는 것을 해보고 싶었다. 엄마에게도 '쉼'이 필요했다. 지금 와서 보니 나이 60이 다 되어 떠난 생애 첫 여행이 '배낭여행'이다.
3. 아이에게 ' 특별한 경험'을 심어주고 싶었다.
사실 전업주부가 아니다 보니 아이와 함께 한 기억이 얼마 없다. 워킹맘으로 살아가면서 나름대로 일과 가정에서 균형을 맞추려고 했다. 하지만 나에겐 언제나 일이 우선이었다. 엄마가 아이를 봐준다는 ' 명분?'이 있었기에 그 균형은 더 쏠리기 시작했다. 아이는 항상 나와의 시간을 그리워했다. 아이가 소풍이나 견학을 가도 , 체험을 가도 할머니가 내 자리를 대신했다. 미안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함께 살았기에 아침, 저녁으로 얼굴은 볼 수 있었다.
4. 나에 대해 돌아보다
나는 한 가지에 몰두하면 다른 것을 잘 못 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옆에 누가 있는지 모를 정도이다. 좋게 말하면 몰입이 좋다, 나쁘게 말하면 '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광적 집착'이다. 정신없이 군생활을 하고 '소령 진급을 1년' 정도 앞둔 시점, 나는 나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내 방향이 옳은가?"
하필, 왜 이 시점었을까? 왜 이 시점에서 이런 뜬금없는 생각을 했을까?
인생에서 잠시 ' 쉼'이라는 단어를 택해야 할 때가 그때였다 보다. 당시는 휴직이란 제도도 지금처럼 잘 되어있지 않았다. 진급하려는 사람이 '휴직'을 한다는 것은 '위험한 모험'이었다. 내 의사를 밝히자 주변 사람들이 극구 말리기 시작했다.
" 이제까지 잘 쌓아놓고 왜 그래, 조금만 더 고생하자"
" 다들 진급하려고 난리인데 굳이 빌미를 줄 필요는 없잖아"
"야~네 동기들은 너한테 밥 사야겠다. 유력한 1차 진급자 한 명이 나가줘서......"
모두 나를 염려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듣고 움직이기엔 늦었다. 내가 '쉼'을 택한 이유가 '외부'에 있지 않고 ' 내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중대장 보직을 마치는 날 3일 뒤로 D-day를 잡았다.
그렇게 나는 나와 내가족을 위한 루트를 짰다. 내 여행 스타일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잘 짜 놓아도 예기치 못한 일들은 발생을 한다. 그렇다면 큰 틀만 세워놓으면 된다. 물론 나 혼자 가는 게 아니라 신경 쓸 것은 많았다. 미리 각 국가마다 치안상항을 파악하는 것, 미리 예방접종을 하는 것 같은 것이다.
그렇게 출발일자, 도착 일자, 비행기, 첫 숙소와 대략적인 루트 정도만 정해놓았다. 나머지는 여행이 주는 '불확실성'에 맡기기로 했다. 부족한 것은 부족한 대로 그때 상황에 맞추어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