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과 결단
엄마의 자세하고 객관적인 관찰력으로 아이를 보면 아이가 초등 고학년쯤 되면 아이들이 흥미를 보이거나 재능을 드러내 보이는 부분들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학습 쪽이 아니면 엄마들은 그 재능을 부인하거나 혹은 예체능 쪽이면 돈 든다고 아예 배제를 시키는 경향이 있다.
아이를 대할 때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보면 작은 것 무엇 하나라도 아이의 관심 분야와 재능을 찾을 수 있다.
부모들은 기성세대에서 인정하는 직업들 예를 들면 교사, 공무원, 의사, 변호사, 대기업 직장인 등으로 갈 가능성이 아니면 아이의 재능이 뭔지 모르겠다. 아직 드러내지를 않는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코로나 팬더믹을 지나면서 요즘은 직업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의 변화가 서서히 생겨나고 있다.
유튜브 크리에이터나 연예인, 요리사나 창업 쪽으로도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는다.
부모들이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쓸데없는 데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않고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있다.
100세 시대라고 말할 만큼 수명도 길어지고 이제 한 가지 직업으로는 일생을 살기에는 부족하다.
그리고 부모님들이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직업들도 앞으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이며 이왕 인생을 사는 것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부모로서 당연히 하게 된다.
첫째 아이가 진로를 결정하게 된 과정을 보면 어렸을 때부터 이과 쪽 성향이라 이과 쪽으로 독서 활동과 체험 활동 수업을 꾸준히 해왔다.
다행히 아이가 흥미를 가져서 꾸준히 일정 기간 인풋을 한 것이 진로 결정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만 7세 때까지 유년 시절을 독일에서 보내면서 학습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고 정말 눈뜨면 해질 때까지 신나게 놀면서 지낸 경험이 아이의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자존감이 강한 캐릭터 형성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이 7세 때 독일에서 귀국할 때쯤 아이는 독일어를 회화로는 유창하게 원어민처럼 구사했었지만 독일의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으로 왔기 때문에 쓰기 공부가 병행되지 않았고 한국에 와서 자연스레 독일어를 쓰지 않으니 너무나 아깝게도 독일어 능력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다가 잠시 다닌 한국의 유치원에서 지낸 과정에서의 실망으로 아이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있었다.
아이 초등 1학년 1학기 마치고 2학기에 집에서 자동차로 30~40분 정도 걸리는 조그만 외국인 학교의 개학 날짜에 맞춰 전학시켰다.
그 학교는 외국인 학교지만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금수저 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그런 화려한 귀족학교가 아니라 울산의 배 만드는 회사 중공업에 파견 온 외국인 직원 자녀들을 위해 회사에서 만든 규모가 아주 작고 한 학년이 한 반 밖에 안 되는 조그만 학교였다.
4학년 2학기에 다시 한국 초등학교로 전학을 오기 전까지 아이는 만 3년을 자유분방하고 학업 스트레스 없이 계속 신나게 뛰어놀았다. 결국 영어 때문에 보낸 것이 아니냐 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영어 환경도 아예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나에게는 그것보다 아이가 10살 때까지 본인의 캐릭터와 개성이 한창 생성되는 시기에 주입식 교육으로 아이가 획일화된 사고를 가지는 게 더 마음에 걸렸었다.
아이의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격체 형성에 이제까지 노력해 왔던 것이 물거품이 될까 걱정했던 마음도 있었고 영어 학습적인 부분의 완성도 솔직히 조금 기대하긴 했다
하지만 그 학교에 보냈다고 해서 영어가 저절로 해결된 것이 절대 아니다.
그 학교에 다니던 아이뿐만 아니라 외국으로 연수를 다녀온 학생들을 보면 영어가 전혀 늘지 않거나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온 아이들을 많이 봤다.
그 학교를 보내는 대신 나는 가정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을 더 많이 했다.
아이가 집에서 학교까지 왕복하는 하루 총 90여분의 시간 동안 영어책 CD를 차에서 틀어 주고이 CD는 일주일 간격으로 바꾸어 주어서 한 CD의 내용은 외울 정도로 충분히 이해하도록 했다.
90분씩 5일, 일주일 동안 450분을 집중 흘려듣기 하는 것은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니다.
시리즈로 된 영어책, 특히 아이가 좋아하는 장르의 책을 사줘서 아이는 그 갱지로 된 책이 너덜너덜 해질 때까지 읽었다.
초등학교 4학년 2학기에 한국의 초등학교로 전학 온 후 아이가 적응해야 할 몇 가지 부분들이 있었다.
그 전에는 아이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시험이란 것을 쳐본 적이 없었다.
4학년 2학기 들어오면서 학교에서 중간고사를 친다고 하는데 아이가 시험이 뭐냐고 어떻게 하는 거냐고 나에게 물었다. 아이는 나름대로 시험이 뭘까 곰곰이 생각한 것 같다. "강당에 올라가서 치는 것인가요?" 뭐 이런 식으로 나에게 물을 정도로 정말 시험이란 것에 대해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막상 학교에서 치는 시험을 보니 아이는 객관식 형태의 시험 방식에 좀 당황했다.
자기 생각에는 모두 답이 될 수 있어서 한 가지 답을 고르기가 정말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그것을 그 전 학교에서 배워온 것이다. 모든 것이 답이 될 수 있다는 유연적인 사고이다.
또 한 가지, 4학년 2학기에 전학 오면서 이 전의 환경과는 다른 한국 학교의 환경으로 조금씩 사춘기가 오는 여자 아이들과 약간의 교우 관계의 트러블도 있었다. 이 전의 학교에선 체육활동을 중요시 여겨서 체육 시간엔 팀워크로 최선을 다해 경기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업 매너였다.
아이는 체육과목을 좋아해서 체육시간에 적극적으로 경기에 임했다. 승부를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이 같은 반 여자아이들의 못마땅한 시샘을 받기 시작했다.
아이는 상처 받고 적극적인 성격을 조금씩 숨기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친구들과 친하기 위해 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고 본다.
나는 그렇게 소심하게 변해 가는 아이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지만 아이가 환경에 스스로 적응하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한국 학교의 학업도 스스로 조금씩 해결해 가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아이에게 어느 정도 가이드는 주되 한 걸음 뒤 떨어져서 지켜보고 도움을 필요로 하면 도움을 주는 게 부모의 역할인 것 같다.
도움이 필요하면 아이는 분명한 신호를 보내고 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