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가끔 그립다
약 15년 전의 일이다. 88체육관 새벽 6시 수영을 다닐 때였다. 내가 살던 신월동에서 88체육관까지는 차로 20분 가까이 소요되었다. 집에서 늦어도 5시 30분에는 출발해야 강습에 늦지 않았다. 그날도 그 무렵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며 우리 집 대문 앞에 누군가 패브릭 강아지 집을 버린 것을 보았다. 지붕이 있는 파란색 집이었다. 강아지 집은 수영을 다녀온 후에도 그대로 있었다.
야간 일을 마치고 형님이 집에 들어오며 이렇게 말했다. "누가 집 앞에 개를 버렸네." 대략 오전 10시 정도였다. 개는 돌아다니는 짐승이기에 집 앞에 개를 버렸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누가 개집이랑 개를 같이 버렸어." 그제야 새벽에 보았던 파란색 강아지 집이 생각났다. 얼른 뛰어나갔다. 집 안에는 작은 치와와가 한 마리 들어 있었다. 출입문도 없는 패브릭 집이었지만 강아지는 집을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처음 본 것이 5시 30분이었으니 최소한 6시간 가까이 그렇게 혼자 방치되어 있었던 셈이다. 만약 전날 저녁에 버린 것이라면 12시간 가까이 방치되었을 수도 있었다.
강아지는 내가 조금만 가까이 가도 으르렁거렸다. 그러면서도 차 소리가 들리면 고개를 바짝 쳐들고 두리번거렸다. 자기를 버린 주인을 기다리는 것이 분명했다. 물론 집안에서는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강아지를 긴장시키고 싶지 않았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오래도록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가서 먹을 것을 챙겨 나왔다.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1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먹을 것을 두었는데, 조심스럽게 앞 발 하나를 내밀었다. 그리고 다른 한 발도. 그렇게 천천히 경계를 늦추며 집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나와 식구가 되었다. 집으로 들인 그날, '땅콩'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땅콩은 꽤 영리한 아이였다. 특별히 훈련한 것도 아닌데 기본적인 말들을 이해했다. 먹어! 먹지 마! 앉아! 올라와! 내려가! 집으로 들어가! 등등. 처음에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서 많이 혼냈다. 하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서 욕실에 가서 일을 해결하기 시작했다.
내가 집에 없을 때는 당연히 늘 형님 곁에 있었다. 특히 형님은 땅콩에게 고기를 거의 매일 주다시피 했다. 집에서 소주를 마시는 형님의 주된 안주는 수육이었고 부드러운 비계는 자신이 먹고 살코기는 땅콩에게 주었다. 그렇게 형님 곁에 있다가 먹을 것이 떨어지면 내 방으로 왔다. 밤늦게 들어가는 날이면 형님 방에서 자고 있다가도 내 방으로 와서 잠들고는 했다. 어떤 날은 형님이 방문을 닫은 채 땅콩과 잠을 자기도 했지만 내가 들어간 후에는 방문 앞에서 끙끙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방문을 열어주어야만 했다. 때문에 나는 방문을 항상 20cm 정도 열어 두고 생활했다. 언제든 땅콩이 들락날락할 수 있도록. 그 무렵 형님이 그렇게 말하기도 했었다. "이놈은 먹을 때만 내 옆에 있어!" 그럴 때면 "강아지를 먹을 것으로 키우지 말고 사랑으로 키워야지." 그렇게 말하곤 했는데, 형님 입장에서는 조금 약이 오르는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물론 형님도 나 이상 땅콩을 매우 아꼈고 병원을 다니며 예방주사를 맞힌 것도 형님이었다. 단모종이었기에 미용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형님은 가끔 땅콩을 데리고 애견숍에 가서 털을 바짝 밀어 오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땅콩은 훨씬 더 예뻐졌다.
컴퓨터 앞에서 일을 할 때는 무릎에 앉혀두고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1~2년이 지난 후에는 무거워졌고 무릎에 장시간 앉히는 것이 불편할 정도가 되었다. 형님에게서 독립하면서 당연히 땅콩을 데리고 나왔다. 땅콩은 건강했다. 잔병도 없었고 다친 경우도 없었다. 조금 길게 여행을 갈 때가 문제였다. 1박2일은 혼자 두었다. 땅콩에게 미안한 것은 당연했지만 함께 살아가는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를 배려해야 하고, 그 부분에 있어서는 땅콩이 나를 이해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행이 며칠이 될 때는 누님이 돌봐주었고 그 이상이 될 때는 형님 집에 맡겼다.
땅콩은 조용한 아이였다. 짖는 일도 거의 없었다. 다만, 집을 두고도 내 의자 밑을 맴돌 때가 많아서 자리에서 일어날 때에는 조금 신경을 써야 했고, 싱크대 앞에서 있다가 돌아설 때도 땅콩이 밟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우리 집은 아직도 열쇠 잠금장치다. 외출하고 돌아올 때면 건물 밖에서 미리 열쇠를 챙기는 것도 필요했다. 현관 앞에서 열쇠를 꺼낼라치면 그 사이를 못 참아서 끙끙대기 일쑤였고, 혹시나 그 소리가 옆집에 들릴까 봐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입문 앞에 서자마자 곧바로 문을 열기 위해 미리 열쇠를 챙겨야 했다.
그랬던 땅콩이었다. 하지만 1~2년 전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동작이 느려졌고 심지어 내가 문을 연 다음에서야 집에서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반지하 욕실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못하고 끙끙대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계단까지 만들어주었다. 불안해졌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꾸만 불안해졌다. 문을 열고 들어와도 땅콩이 보이지 않을 때는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뒤늦게 잠에서 깨어 걸어오는 것을 보고는 안도하기를 몇 번.
그래도 그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당연히 오겠지만, 그래도 영원히 오지 않을 것처럼 그날은 나에게 여전히 현실감이 떨어지는 일이었다. 약 한 달 반 전이었다. 산책을 마치고 목욕까지 끝낸 후였다. 패브릭 방석 안에서 잠들어 있던 땅콩이 새삼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단잠을 깨우고 싶지는 않았지만 하도 예뻐서 살짝 이마에 뽀뽀를 해주었다.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또 한 번 뽀뽀를 해주었다. 그때 땅콩이 눈을 떴다. 조금 이상했다. 어눌해 보였다. 그리고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땅콩은 일어나지도 못하고 몸만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보도 듣도 못한 증상이었다.
그날은 밤이 깊었고 그렇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나는 일이 있었고 누님과 조카가 땅콩을 데리고 병원에 다녀왔다. 달팽이관 뒤 어딘가에 염증이 있거나 뇌의 문제로 추측된다는 소견을 받았다. 약을 받았고 머리를 부닥치지 않도록 케이지 안에 두라고 했다. 병원에 다녀온 후에도 땅콩은 달라지지 않았다. 기저귀를 차고 있어야 했고, 주사기로 먹을 것과 물을 주어야 했다. 아침저녁으로 꼬박꼬박 약도 먹였다.
1주일 후 다시 병원에 갔다. 땅콩의 병에 대해서 묻자 의사는 조금 귀찮은 듯 대답했다. 이미 지난주에 모두 설명했다는 투였다. 누님에게 전해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의사에게 직접 설명을 들어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의사의 말투가 섭섭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1주 차가 지나자 땅콩은 조금 호전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옷 속에 땅콩을 품고 병원을 다녀오는 길에 그렇게 말했다. "임마! 걸어! 걸어야 해! 안 그럼 죽어, 임마."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는 땅콩을 보고 있자면 눈물만 나왔다. 나는 안락사를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는 않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편하게 보내주는 것이 더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도 존엄사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다행히 땅콩은 조금씩 좋아졌고 3주가 될 무렵에는 더 이상 주사기로 먹이를 주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다. 물론 예전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사료도 먹지 못했고 리커버리 통조림만 비틀비틀 거리는 몸으로 겨우 먹을 정도였다. 먹을 때 몸을 잡아주지 않으면, 먹다가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지기 일쑤였지만 더 이상 주사기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대소변도 가릴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조금이나마 좋아진 것을 생각하면 그깟 기저귀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약 열흘 전이었다. 나는 전날 저녁부터 컴퓨터 앞에서 밤을 새우고 있었다. 새벽 5시 무렵이었다. 잘 자고 있던 땅콩이 갑자기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발작이 시작되었다. 나는 어디에서도 그런 발작을 본 적이 없었다. 품에 안았지만 발작은 멈추지 않았다. 땅콩의 발작은 마치 전기 충격을 받는 모습과도 같았다. 20~30초 간격으로 온몸을 빳빳하게 경직시키며 발작을 했다. 땅콩의 발작은 너무 처절했고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괴로웠다. 누님에게 전화를 했다. 당황해서가 아니라 마지막일 것 같아서였다. 내 전화를 받고 온 누님도 당황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땅콩은 내 품에서 똥과 오줌을 싸기 시작했다. 온몸을 경직시키며 그토록 발작을 하면서도 똥과 오줌이 줄줄 새고 있었던 것이다. 발작과 발작 사이에는 한숨 돌리기는 했지만 그때의 숨은 정말 가늘고 얕았다. 내 몸에 똥과 오줌을 한가득 쌌지만 땅콩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곧 숨이 멈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었다. 내려놓는 순간, 숨이 멈출 것 같았다. 품에 안긴 채 보내고 싶었다. 누님은 땅콩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몇 번이고 그렇게 말했다. "괜찮아. 그만 힘들어하고 편하게 가." 누가 그 마음을 알까. 가슴이 미어졌다.
누군가는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도 동물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동물은 동물이다.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생명은 모두 귀한 것이 아니겠는가. 1시간 이상 발작은 계속되었고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땅콩을 잠시 누님 품에 안기고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까 봐 서둘렀다. 물티슈로 땅콩을 닦고 기저귀를 채운 후 다시 품에 안았다. 누님도 출근을 해야 하니 돌아가야 했다.
사실 땅콩의 마지막 모습일 것 같았다. 그렇게 발작을 하다가 곧 숨이 멈출 줄 알았다. 하지만 발작만 계속되었다. 다니던 병원 간판에는 '24시간'이라고 쓰여있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인터넷을 검색해서 24시간 동물병원을 찾아보았다. 가까운 곳에 전화를 했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어찌 해서든 조금만 더 버틴 후 다니던 병원 오픈 시간에 맞춰 달려갈 생각이었다. 정확한 오픈 시간을 알아보기 위해 다니던 병원을 검색해 보았다. 오픈 시간은 9시가 아니라 10시였다. 땅콩을 10시까지 이 상태로 두는 것은 잔인한 일이었다. 다시 한 번 24시간 동물 병원을 검색했다. 목동에 있는 병원에 전화를 했다. 야간 진료가 가능한 곳이었다.
8시 무렵 차를 몰고 목동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 후 당직 의사와 상담이 진행되었다. 정식 진료는 9시 30분이나 되어야 가능하다고 했다. 이제 할 수 있는 건 CT나 MRI 촬영 등이었다. 땅콩 나이 최소 16살. 안락사에 대해서도 물었다. 의사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진행할 수 있다고 답했다. 이쯤에서 편하게 보내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15년을 함께 살았다. 어찌 해서든 안락사보다는 자연사로 보내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연사를 고집하는 건 땅콩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안락사도 진료 시간처럼 9시 30분 이후에나 가능하다고 했다. 그 사이 땅콩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안정제 주사를 맞히기로 했다.
안정제를 맞은 땅콩은 10분쯤 지나자 조용해졌다. 땅콩을 안고 병원에서 대기하며 많이도 울었다. 조용해진 땅콩의 숨은 정말 가늘었다. 집에서 발작과 발작 사이에 보았던 숨보다 훨씬 가늘었다. 어찌나 가늘던지 땅콩을 안고 병원을 나오고 싶었다. 살 것 같아서가 아니라 죽을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안고 조금만 더 있으면 내 품에서 조용하게 생을 마감할 것 같았다.
9시가 넘어가자 의사들이 하나둘 출근하기 시작했다. 병원은 사람으로 치자면 대학병원 급이었다. 목동의 고급(?) 손님을 위한 최고의 시설. 시간이 지난 후 땅콩은 조금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생전 짖는 것 보기 힘든 땅콩이었는데, 자꾸만 짖어댔다. 하지만 보통의 짖는 소리와는 달랐다. 딸꾹질처럼 이상한 소리였고 소리도 매우 작았다. 입을 반쯤만 벌리고 닫을 때도 반쯤만 닫았다.
이윽고 간호사가 나를 불렀다. 2층 진료실로 올라갔다. 진료실은 4개나 되었다. 의사와 최종 상담을 했다. 의사는, 자기 병원은 안락사를 권하는 병원은 아니지만 워낙 노견이고 상태가 좋지 않아서 진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안락사 비용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물었다. 몰랐다. 비용은 30만 원이었다. 딱히 얼마를 예상해 본 적도 없었지만 비싼 금액이었다.
의사는 안락사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우선 '라인을 잡는다'라고 말했다. 아마도 정맥이나 동맥 같은 것을 찾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이후 안정제를 투여하고, 그다음 진통제를 투여한 다음, 마지막으로 안락사 약물을 투여한다고 했다. 준비를 할 동안 밖에서 대기하라고 했다. 의사에게 땅콩을 안기고 잠시 밖에서 대기했다. 그 사이 또 밖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윽고 준비를 마친 의사가 불렀다. 의사와 상담하던 진료실 뒤편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조금 당황했다. 마치 거대한 수술실 같았다. 매우 넓었고 온갖 의료 기기들로 가득했다. 여기저기에서 의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도 했다.
땅콩이 누워 있는 병실로 들어섰다.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땅콩은 잠이 들었고 다리 몇 곳에 알 수 없는 선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기계에서는 땅콩의 심박에 따라 주기적인 그래프가 그려졌다. 두 명의 의사가 입회를 했고 진행해도 되겠는지 물었다. 땅콩의 손을 잡아주었다. 바보!!! 아침에 일어나면 잠이 든 것처럼 평온하게 떠나면 얼마나 좋을까. 애초의 주인에게까지 버림받고 떠나는 마당에도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평생 나 같은 주인과 함께 살았으니 복도 지지리도 없는 놈이었다.
땅콩이 살아 있는 마지막 모습이었기에 의사의 허락을 받고 사진을 찍었다. 나의 대답을 들은 의사가 발에 연결된 호스에 진정제를 투여했다. 투명한 액체였다. 그리고 다음에는 진통제를 투여했다. 진통제는 하얀색 불투명 액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락사 약물을 천천히 투여했다. 준비한 약물을 반도 투여하지 않았는데 의사가 투여를 멈추었다. 땅콩의 손을 잡고 있느라고 보지 못했는데, 그 사이 이미 심박이 멈추었고 기계의 그래프는 평행선을 긋고 있었다. 다른 의사 한 명이 청진기로 맥박을 확인했다. 의사들 둘이 사인을 주고받았다. 죽음을 확인하는 사인이었다. 그렇게 땅콩은 세상을 떠났다.
다시 밖에서 대기를 했고, 10여 분 후 의사는 땅콩이 담긴 하얀 박스를 들고 나왔다. 박스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예쁜 천사 아가 편안히 잠들거라. 저 하늘에서 좋은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놀 수 있기를... 너를 만나 행복했다. 고맙고, 사랑한다.' 반려동물을 보내는 마음은 다 같은 모양이었다. 너를 만나 행복했다. 고맙고, 사랑한다!
땅콩을 차에 싣고 집으로 왔다. 아파서 병원에 갔다가 주검이 되어 돌아온 집이었다. 나와 처음으로 여행을 갈 때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혔다. 몇 개월 전부터 애견 화장장을 알아봐두었었다.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저장해 두었던 홈페이지들을 살펴보았지만 혼란스럽기만 했다. 서로 자기들만 정식 허가 받은 업체처럼 홍보하고 있었다. 전화번호들도 가짜가 많았다. 여러 개의 지사가 있었지만 결국 업체는 하나였다. 김포시청으로 전화를 했다. 정식으로 허가받고 등록된 업체를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김포시에 정식 등록 허가된 업체는 5곳이었다. 그중에 한 곳에 전화를 한 후 출발했다.
화장장까지 운전하면서 또 울기 시작했다. 바보! 바보! 바보! 어찌 그리 복도 없었을까. 이제 나 같은 주인은 잊어! 나 같은 주인은 돌아보지도 말고 떠나라! 나도 너 잊고 자유롭게 여행 다닐 거다. 길게 여행을 갈 때면 너를 어디에 맡겨야 하는지 그따위 고민은 이제 하지 않아도 되니까. 행여 나 같은 주인은 절대 그리워하지도 말고 미련 없이 떠나라.
땅콩의 몸무게는 불과 2kg. 마지막 순간에 모든 것을 비워낸 탓에 더욱 가벼웠다. 직원은 애써 입힌 옷을 벗기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목에 고무줄이 많은 옷이었는데, 자칫 뼈에 묻어서 검은 불순물처럼 남을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원하면 함께 화장할 수도 있다고 했다. 직원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나와 여행을 떠날 때 입었던 옷은 수목장을 하게 된다면 그때 사용해도 될 것 같았다. 직원은 무명천에 땅콩을 눕힌 후 촛불을 켜주었다. 그리고 잠시 마지막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주었다.
창문을 넘어온 정오의 햇살이 땅콩 위에 따뜻하게 내려앉았다. 한파가 몰아치고 오지게 바람이 불던 날이었지만 실내로 들어온 햇살은 따뜻해서 다행이었다. 왠지 고생만 하다가 떠난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가만 생각하면 내가 땅콩을 아껴준 것보다 땅콩이 나를 생각해 준 것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난 밖에 나가서 누구든 만날 수 있었지만 땅콩은 내가 없는 날이면 온종일 나만 기다려야 했으니까. 그래도 출퇴근하는 사람이 아니라 밖에서 일이 없으면 하루 종일 같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을 위로 삼았다.
직원은 무명천으로 감싼 땅콩을 들고 화로가 있는 공간으로 들어갔다. 유리 너머로 땅콩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잘 가라! 이제는 정말 안녕! 유리 앞에는 분향소가 있었고 땅콩이 화장되는 사이 땅콩의 영정 사진을 띄울 수 있었다. 화장장 메일로 땅콩 사진을 보내면 태블릿에서 곧바로 띄워주는 방식이었다. 그런 과정이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모든 것이 낯설었다. 새벽에 병원에서 찍었던 사진을 보냈다. 가장 마지막에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직원이 땅콩 얼굴만 확대하려고 했다. 나와 함께 찍은 모습 그대로 올려달라고 부탁했다. 땅콩 홀로 있는 사진보다는 나와 함께 있는 사진을 올려주고 싶었다. 외롭지 않도록. 사진 속의 땅콩은 하나도 아프지 않은 듯 보였다. 쓰러지듯 눈을 감는 땅콩을 데리고 십여 장을 찍어서 건진 사진이었다.
불과 40분도 되지 않아서 땅콩은 한 줌의 재로 변했다. 분쇄한 유골을 곧바로 유골함 항아리에 넣는 줄 알았다. 하지만 한지에 곱게 담아 깔끔하게 접은 후 유골함 항아리에 넣었다. 말 그대로 손바닥에 올려둘 정도의 한 줌이었다. 유골함 항아리는 다시 고운 보자기로 감쌌다. 직원들은 모든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예의를 갖추었다. 동물이지만 한때 사랑하는 가족이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땅콩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떠났다. 화장을 하는데도 20만원이 들었다. 그나마 땅콩은 가벼워서 최소 비용이었다. 결국 땅콩은 마지막 가는 마당에도 내 한 달 원고료를 탈탈 털어먹고 떠났다. 나쁜 놈, 매정한 놈. 땅콩의 유골이 담긴 항아리는 보자기에 싼 그대로 지금 내 책상 위에 있다. 이 유골을 어찌할지는 49일이 지난 후 결정할 것이다. 땅에 묻을 수도 있고, 메모리얼 스톤을 만들 수도 있다. 아니면 일부만 메모리얼 스톤을 만들고 나머지는 묻을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반려동물의 유골로 메모리얼 스톤을 만드는 일은 엽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땅콩의 유골로 메모리얼 스톤을 만들든 그렇지 않든, 지금 나에게 그런 일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었다.
난 아직도 땅콩의 환상을 본다. 외출 후 문을 열고 들어올 때면 땅콩이 걸어올 것만 같고, 의자에서 일어나다가 바닥에 있는 황색 가방을 보면 땅콩인 줄 알고 깜짝깜짝 놀란다. 싱크대 앞에서 설거지를 하고 돌아설 때 조심하는 버릇도 여전하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외출할 때 이제는 더 이상 불을 켜두지 않아도 된다는 것뿐이다.
몇 개월 전부터 땅콩이 점점 쇠약해진다는 것을 느꼈고, 그래서 조금 더 자주 안아주었다. 무릎에 앉히고 종종 일을 하기도 했었다. 무릎에 앉히고 일하는 것은 성견이 되고부터는 거의 하지 않았었다.
땅콩은 왜 그토록 나를 따라다녔을까? 비좁은 반지하 셋방에서 갈 곳도 없었지만 주방으로 가면 주방으로 따라오고, 작은방으로 가면 작은방으로 따라왔다. 땅콩 때문에 욕실 문을 늘 열어두었는데, 내가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을 때도 땅콩은 욕실 앞에서 나를 지켜보았다.
시간이 지나면 잊을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준 축복은 망각이 아니겠는가. 제발 바라는 것은, 땅콩이 어디에서든 나를 그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움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난 상관없다. 난 어찌 해서든 견디고 언젠가는 잊을 것이다. 그러니 땅콩도 부디 나를 잊었으면 좋겠다. 그리움 따위는 잊고 세상에서 단 한 번도 상처받아보지 않은 것처럼 철없이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움을 간직하는 것은 나 하나로 충분하다. 난 아파도 견딜 수 있지만 땅콩은 그러기에는 너무 착한 아이였다.
땅콩, 고마워.
너를 만난 건 축복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