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안다’라는 속담이 있다. 세상사의 이치 한 부분을 잘 보여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평소에는 새까맣게 잊은 채 기고만장해하다가 벌어진 사건을 되돌릴 수 없음에 후회와 자책이 몰려올 때쯤 깨닫게 된다는 게 곤혹스럽지만 말이다. 배려심 가득하고 마음 착한 연인이 홀연히 떠나가 버렸을 때, 평소에 관심 주지 않던 선수가 이적하자마자 응원하는 팀이 연전연패를 거듭할 때, 별미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주인이 대단히 친절한 것도 아니지만 편안함에 습관적으로 늘 찾던 식당이 문을 닫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제야 그것이 지닌 가치의 깊이와 사라진 뒤에 남는 빈자리의 크기를 실감하게 된다.
석 달 전쯤이었을 거다. 철도 노조의 파업이 한창이었다. 운행되는 열차가 대폭 줄었고, 줄어든 열차의 숫자에 비례하여 열차 하나가 감당해야 하는 승객의 수가 늘어났다. 평소에 그러지 않았다는 건 아니지만,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역과 지하철의 공기는 열차의 지연에 사람들이 내뱉는 짜증과 서로 밀치고 구겨지면서 생기는 신경질로 인해 숨 쉴 만한 작은 공간조차 찾기 힘들었다. 지하철의 ‘난자리’를 피부로 느끼는 시간이었다.
그때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기다리기와 참기뿐이었다. 별수 없었다. 노사가 민주적인 과정을 거쳐 파업이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간혹 이번 파업뿐만 아니라 그게 어떤 이유에서 촉발되었는지 전후맥락을 무시한 채 온갖 요상한 말들을 섞어가며 파업에 참여한 사람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걸 가만히 듣고 있으면 지금이 20세기 중반인지 21세기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하던 얘기로 돌아가자. ‘트럭이 없으면, 오스트레일리아가 멈춘다’는 말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대형 트럭에 아주 크고 선명한 글씨로 쓰여 있는데, 운송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준다. “우리한테 잘하라고, 수틀리면 확 드러눕는 수가 있어” “그때 가서 후회해도 얄짤없어.” 거구의 아저씨가 나를 노려보며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이 상상돼 겁이 나기도 한다. “저는 입도 뻥긋 안 했습니다만….”
이렇게 된 이상, 아예 늦는 걸 택한다!
위의 말을 지하철 파업 당시의 상황에 비춰보면 대략 이런 구호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지하철이 멈추면, 정시 출근도 빠른 귀가도 없다.’ 대체 인력이 투입되어 출퇴근 시간에는 열차 간 간격이 비교적 크지 않았지만, 출퇴근을 위해 지하철만 목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들의 행렬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승강장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길어졌다. 열차가 지나간 뒤에도 마찬가지. 열차의 문이 열리는 건 사람을 태우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타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인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열차 내에는 바늘 하나 꽂을 자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스마트폰과 손목에 찬 시계로 야속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처연하게 바라보는 일 뿐이었다. 한편 대열의 후미에 자리 잡은 사람, 선두에 서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담담해 보였는데, 어차피 이번에 들어오는 열차를 타기 글렀다는 사실을 단념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짧게는 10분 길게는 20분 뒤에 찾아올 다음 기회를 기다리며.
나의 처지라고 크게 다를 게 있을 턱이 있겠는가. 내가 퇴근하는 시간이 지하철이 들어오는 시간과 앙숙 관계인지 몰라도, 파업 기간 내내 한 번도 플랫폼에 도착하고 나서 첫 번째로 들어오는 지하철을 타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어차피 기다릴 거, 이럴 거면 차라리 일이나 더 하다가 올걸 그랬구먼’ 하는 아쉬움을 느낀 적은, 결코 단 한 번도 없었다. 추위에 떨게 되고, 더위에 기진맥진해지는 악조건에서 기다린다 해도 회사 밖이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겐 심심함, 지루함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 신세계를 열어주는 스마트폰이 있지 않은가.
고백하자면, 열차에서 사람들이 내리는 틈을 타 새치기를 시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이 컸던 적도 몇 번 있다. 가뜩이나 경의선은 다른 노선에 비해 열차가 띄엄띄엄 다니는데, 여기에 파업의 파장이 더해져 열차 한 대를 놓치면 20분 넘게 기다려야 했으니 말이다. 어디선가 귀를 간질이고 마음을 뒤흔드는 유혹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비난과 창피함은 잠깐이지만, 푸근한 집에서 즐기는 달콤한 휴식은 무려 20분이라고!’
안면몰수를 저지르고도 그 대가로 돌아오는 게 고작 20분의 휴식밖에 되지 않아서였을까. ‘20분 더 쉰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잖아.’ 유혹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어쩌면 동료이자 경쟁자인, 가뭄에 콩 나듯 도착하는 지하철만 하염없이 기다리는 주변 승객을 배신할 용기가 없었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아쉬움의 찌꺼기가 말끔히 쓸려 내려가지 않아서 지하철이 떠난 지 한참 뒤에도 마음이 개운하지 않을 때면, 무라카미 하루키식으로 ‘그런 거지 뭐’ ‘그래서 뭐’ 하고 그러려니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거지 뭐’ ‘그래서 뭐’, 이 두 가지는 인생의(특히 중년 이후의 인생의) 양대 키워드다. 경험으로 말하는데, 이 두 가지만 잘 새기고 있으면 인생의 시련 대부분을 큰 탈 없이 이겨낼 수 있다.”
- 무라카미 하루키 글·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김난주 옮김, 문학동네, 2012. 88~89쪽.
생각보다 효과가 좋은, ‘그런 거지 뭐’ ‘그래서 뭐’
의외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초연함의 약의 효험은 바로 나타난다. 조바심하는 마음이 한방에 씻겨 내려간다. 지하철이 20분이 아니라 40분 늦게 도착하는 건 답답한 일이 아니라 오랜만에 여유롭게 책을 볼 수 있는 쉬는 시간이 되었고, 먼 길을 헤치고 도착한 지하철에 앉을 자리 하나 없는 건 불행하고 피곤한 일이 아니라 하루 종일 앉아 있느라 뻣뻣해진 목과 허리의 긴장을 풀어주는 스트레칭이 되었다.
경의선은 일반 열차와 급행 열차가 따로 있어, 가는 도중에 먼저 출발한 일반 열차가 급행 열차에 길을 내주고 급행 열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출발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 둘이 겹치는 순간에 내리면 급행 열차로 옮겨 탈수 있어 목적지에 좀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5분 먼저 간다고 대단한 행운이라 생기겠어’ 하며 그러려니 수긍하고 넘어간다. 일렁이는 조바심과 다급함을 밀어내고 하던 일을 하는 것이다.
되레 행운은 기다리는 쪽에 찾아올지도 모른다.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온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물론 이 행위가 기다림인지 귀찮음인지는 신조차 분간할 수 없을 테고, 이러한 일로 상을 내리는 신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혹시 하는 설렘이 마음 한구석에서 싹을 틔운다. 어쩌면 다음 열차에 꿈에 그리던 이상형의 사람이 타고 있을지도 몰라(그와의 인연이 실제로 이어지든 안 이어지든), 다음 열차가 오기까지 역사 내를 서성이다가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줍게 될지도 몰라, 평소보다 늦게 도착한 아들딸을 딱하게 여겨 부모님이 큰맘 먹고 치킨을 시켜줄지도 몰라, 하고 즐거운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행운은 아직까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밝아진다.
속는 셈 치고, 아니 무라카미의 말이므로 분명 믿을 만한 이야기이니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한번 시도해보시라. 고민이 간결하게 정리되고, 짜증이 차분히 가라앉으며, 순진한 상상 덕에 기분이 좋아질 테니 말이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일이 산타클로스의 선물을 고대하는 일처럼 흐뭇하고 즐겁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산타클로스가 오지 않고, 선물도 받지 못하면 어떡하느냐고? 그래도 걱정 없다. ‘그래서 뭐, 그런 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