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가 먹는 것이 곧 나다”라고 말한 것이 얼핏 기억난다. 맞는 말이다. 먹는 걸 결정하는 건 나지만, 먹는 것이 쌓여 나를 만들어간다. 먹는 것은 자신에게 영양과 건강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영역을 결정한다. 그렇기에 쌀을 주식으로 하는 지역의 사람과 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지역의 사람은 체형, 습관, 풍습, 문화 등 많은 부분에서 다른 모습을 보인다. 또한 삼시세끼를 인스턴트식품으로 채우는 사람과 자연식품으로 채우는 사람은 건강상태는 물론이고 하는 일, 사는 곳, 취향, 가치관, 라이프스타일까지 다를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먹는 일은 허기를 채우고 영양소를 보충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무엇을 먹느냐의 문제에 더해 누구와 먹느냐, 어디에서 먹느냐, 얼마의 시간을 두고 먹느냐, 어떤 상황에서 먹느냐 등 음식 자체의 물리적 특성 너머의 요소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먹는 행위를 통해 인간이 느끼고 행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친다. 나아가서는 요소 간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어떠한 분위기, 어떤 풍경이 먹는 행위를 ‘밥을 먹는 일’과 ‘식사’로 나눈다.
우리는 동물이 무언가를 먹는 행위를 두고 식사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수업 중간 쉬는 시간에 먹는 과자나 빵을 먹는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식사라고 부르는 일종의 의식은 먹는 대상, 시간과 공간, 함께하는 사람 등 다양한 환경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가능하다. 그리고 “‘밥 먹을 때는 개도 건드리지 말라’라는 말처럼, 식사는 생물학적인 행위인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위엄을 확인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위엄이라고 해서 대단하고 거창한 게 아니다. 위엄은 안정감, 편안함, 즐거움의 다른 표현이다.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식사는 가능하면 허물없이 편한 사람과 함께 먹는 행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편안한 장소에서 먹는 행위, 시간에 쫓기지 않고 정성들여 준비한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행위다. 반대로 좁고 불편한 자리, 시간적 여유가 없는 상황, 배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음식으로 이루어진 식사는 온전한 식사라고 보기 힘들다. 그리고 이와 같이 밥 먹는 행위와 관련한 여건은 우리의 감정, 느낌과 연결된다. 사회학자 김찬호는 위의 이야기에 이어서 무엇을 먹느냐 못지않게 어디에서 먹느냐가 식사에서 중요하다며 어느 대학의 청소 노동자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를 예로 든다. 휴식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독립적 공간조차 마련되지 않아 화장실의 비품 보관칸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공간 문제뿐만 아니라 과중한 업무로 인한 시간 부족 때문일 것이다.
언제쯤이면 가능할까
물론 단순 비교는 무리지만, 일주일의 5일 이상을 동틀 무렵 출근해서 날이 어둑해진 지 한참 지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직장인에게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방송에 출연한 덩치 좋은 연예인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삼겹살을 구워 먹은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한데, 그건 아침마다 출근 준비와 등교 준비로 아침마다 한바탕 살벌하고 급박한 전쟁을 치르는 사람에게는 꿈에서나 가능한 얘기다.
아침에 삼겹살을 구워 먹(을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는 혹은 안 하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물론 식성의 차이일 수도 있다. 삼겹살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꽤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둘을 가르는 결정적인 지점은 아침에 해야 할 일, 아침에 준비해야 할 것의 유무다. 1분이 아쉬운 잠을 끝내고 전날 미리 맞춰둔 알람 소리에 일어나 씻고, 옷을 입는 일련의 출근 준비(만약에 자녀가 있다면 할 일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난다)를 해야 하는 사람은 평소보다 두 시간 먼저 일어나 삼겹살을 먹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잠을 자고 아침밥을 대충 때우는 방편을 택할 것이다.
편안하게 앉아서 느긋하게 즐기는 아침 식사로부터 한없이 멀어진 이들은 길 위에서, 걸어가면서, 달리는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아침밥을 허겁지겁 해치운다. 지하철과 버스, 길거리는 어느새 간이식당이 된다. 대개는 집에서 들고 나온 견과류와 같은 간단한 먹을거리나 아침 일찍 출근하는 직장인을 맞아 샌드위치, 토스트, 빵, 커피, 차, 김밥 등을 판매하는 편의점과 노점에서 산 것이다. 그 음식이 좋은 재료에 성의껏 만든 별미일지라도 그 맛을 음미할 수 없다. 지하철의 주변 사람에게 냄새를 풍길지 몰라 눈치 보게 되고, 먹는 와중에도 쓰레기통이 어디 있는지 살펴야 하고, 옷에 흘리지 않게 계속해서 신경 써야 하니 말이다.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는 말은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아침 9시까지 출근하기 위해 한 시간 남짓, 심하게는 한 시간 이상을 여행해야 하는 직장인에게 적절한 아침 식사는 주말로 제한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저녁을 기다리면 되지 않을까? 말은 쉽다. 그런데, 저녁이라고 상황이 다를까? 안타깝지만 현실은 그렇게 아름답고 평온하지 못하다. 출근에 한 시간 넘게 쓴 사람은 당연하게도 퇴근에도 최소한 그만큼의 시간을 써야 한다. 그리고 이에 더해 출근 전에 했던 일 이상의 크고 작은 일이 퇴근한 뒤 집에 돌아온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상한 음식으로 악취를 풍기는 냉장고, 묵은 쓰레기, 밀린 빨래, 쌓인 설거지, 먼지 한가득인 방바닥이 자기 먼저 깨끗하게 해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저녁 한 끼를 먹기 위해서 해야 할 최소한의 일이 상한 음식 정리하기, 장보기, 설거지하기다. 십중팔구는 ‘오늘은 피곤하니 주말에…’라고 기약 없는 다짐을 한 뒤, 늘 그랬듯이 배달음식 전문점 전단지를 찾거나 식당을 찾아 다시 밖으로 나가는 쪽을 택할 것이다.
사실 여태까지 주저리 늘어놓은 이야기는 모두 제 모습입니다. 저의 출근길은 견과류와 초코우유 하나, 퇴근 이후는 햄버거가 함께합니다. 이래서야, 희망과 기대를 걸 유일한 안식처는 점심뿐입니다. 하지만 그것마저 맘처럼 쉽지 않은데 바로 사장이라는 존재 때문이다. 밖에서 약속이 많아 같이 점심 먹을 일이 거의 없는데, 그의 입에서 “어, 오늘은 약속 없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그날 점심은 식사는커녕 어색하고 불편한 자리로 예약하는 셈이다.
그렇게 저는 오늘도 하염없이 주말을 기다립니다. 막상 주말이 되면 ‘다음주에’를 속으로 외치며 청소와 장보기는 안중에도 없고 대신에 침대와 베개를 택하겠지만 말이죠.
* 김찬호, 『모멸감』, 문학과지성사, 2014, 2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