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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레이 Jan 15. 2017

통근일기:9. 8시30분에 먹는 밥은 저녁일까 야식일까

뜬금없지만 평일에 저녁을 먹는 시간이 몇 시인지 조사해본다면 사람들은 보통 몇 시라고 대답할까? 별 의미 없는 너무 뻔한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진작에 누군가가 이런 조사를 했을지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묻는다면 ‘별 시답잖은 걸 묻는 놈을 다 보네’ 하는 표정을 지으며 쌩 지나가는 사람이 꽤나 많을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저녁이라는 말이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는 무렵부터 밤이 되기 전까지를 가리키기도 하고 동시에 저녁에 끼니로 먹는 밥을 의미하기도 하니, 저녁은 저녁에 먹는 거고 뒤집어 말하면 저녁에 먹으니까 저녁인 거다. 

 무심한 반응이 눈에 선해 스스로 말을 꺼내놓고도 금세 위축되지만 다시 한번 용기를 내서 말하자면, 또 이런 조사는 어떨까?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저녁 시간이 몇 시인지 묻는 설문이다. 이 또한 추측에 불과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이 6시 무렵으로 대답하지 않을까. 역시 추측이지만 6시 무렵이라고 대답한 사람 중에 실제로 6시에 저녁을 먹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늘 6시에 저녁을 먹는 사람은 그게 묻고 대답할 필요조차 없는 자연스러운 일상이기에 질문을 무시하고 지나갈 테니 말이다.       


 여기서 잠시 6시가 이상적인 저녁 식사 시간이라고 대답한 사람의 눈물 없이는 차마 듣기 힘든 사연을 들어보자(물론 추측이고 상상이다). 

① 대학생 김 씨: 제가 야간 수업을 많이 들어요. 야간 수업이 6시에 시작해서 6시에 저녁을 먹는 건 일주일에 한두 번뿐인데요.   

② 군인 이 씨: 잘 못 들었습니다? 아, 석식 말입니까? 하절기에는 저녁, 아니 석식 배식 시간이 5시부터 6시라서 6시에 가면 배식이 이미 끝나 있지 말입니다.    

③ 술집 주인 박 씨: 5시부터 영업을 시작합니다. 6시에 밥 먹는 건 꿈도 못 꾸죠. 먹어도 먹는 게 아니라 거의 마시는 수준이죠.       


 만약 조사원이 우연히 근처를 걸어가던 나를 붙잡고 같은 질문을 한다면 조사원은 채 몇 십 초도 지나지 않아 상대를 잘못 고른 걸 알고 후회할 텐데, 나는 마치 상담사라도 찾아간 양 하소연을 늘어놓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여 혹시라도 마주치게 될지 모르는 조사원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지 않기 위해서라도 여기에 6시에 저녁을 먹고 싶지만 먹지 못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짜증과 불만을 한껏 늘어놓을 생각이다.     



나는 문제없어!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가끔 동네 친구에게 저녁밥을 먹자는 연락이 올 때가 있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어차피 집에 가는 길이고 해서 얼굴도 볼 겸 같이 밥을 먹는데, 이게 저녁 식사인지 야식인지 도무지 구별할 수가 없다. 

 회사에서 빠져나오는 시간은 6시 30분이다. 부지런히 걸어 지하철역에 들어가 7시쯤에 집 으로 향하는 열차를 탄다. 이제 1시간이 지나 지하철역에 도착하면 근처로 마중을 나온 친구들을 만난다. 그제야 저녁 메뉴를 정하기 위한 갑론을박이 시작된다. 너나 할 것 없이 대단한 별미를 먹겠다는 듯이 호기롭게 메뉴를 제안하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보다 더 맛있는 요리를 먹겠다는 투로 대차게 거절하는 격렬한 논쟁이 오가지만, 지겨울 정도로 매일 보는 동네와 친구인지라 특별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어 금세 맥이 빠져버리는 탓에 열에 아홉은 예전부터 자주 가는 백반집에 가게 된다. 그 사이 시간은 훌쩍 더 흘러, 식당에 도착하는 시간은 못해도 8시 30분이다. 

 이쯤 되면 배가 고팠었다는 사실도 잊게 되고 저녁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조차 헷갈리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배가 고픈 거 같긴 한데 밥을 먹어도 1~2시간 뒤면 배고파지는 게 당연지사이므로, 아주 이상적인 저녁 시간인 6시에 밥을 먹었다고 해도 8시 30분이 되면 당연히 배가 허전할 것이다. 저녁을 안 먹어서 배가 허한 것인지 저녁을 먹었음에도 배가 허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곤혹스러운 일이다. 지금 먹는 게 아침이나 점심은 분명 아닐 테고 저녁일 가능성이 가장 높긴 한데, 그렇다면 혹시 저녁을 두 번 먹고 있는 건 아닐까? 

 게다가 시간이 시간인지라 식당의 창밖은 새까맣게 어두워진 동네와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경쟁하듯 화려함을 뽐내는 간판 아래의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로 가득 찬다. 그러면 ‘어, 나도 한잔해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어 술을 시키게 되는데,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1차가 2차가 되어버려 어느새 백반집이 아니라 선술집에 앉아 대놓고 술을 마시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분명 가볍게 저녁만 먹고 일찍 집에 들어가려 했는데 11시가 넘도록 술판을 벌이게 되다니….       


만약 6시에 먹었더라면

 그런데, 이런 한심한 사태가 벌어진 이유는 애초에 내가 먹은 게 저녁이 아니라 야식이라 그런 게 아닐까. 8시 30분에 먹는 밥을 저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술을 퍼마신 건 저녁이 아니라 야식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저녁에 술이 빠지는 건 괜찮아도, 야식에 술이 빠지는 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허구한 날 술은 술대로 마시고 돈은 돈대로 쓰고 다음 날 숙취로 고생하는 건, 분명 이건 다 1시간 30분이나 걸리는 통근 시간 때문이다(6시 정각에 저녁을 먹는다고 해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만요. 아마 더 오래 더 많이 마시겠죠). 그나저나 8시 30분에 먹는 밥이 저녁인지 야식인지, 이 쓸데없는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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