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럴 때가 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영화나 소설의 장면이 내 눈앞에 펼쳐질 때가. 그리고 그 안의 인물이 가상의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가상과 현실 사이에 놓인 문지방을 넘어 찾아온 것이 로맨스 영화나 연애 소설이라면 그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을 것이다. 물론 현실의 나는 작중인물보다 세련되지 못하고 어설픈 탓에 영화 같은 이야기를 제 발로 차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뭐, 그렇다고 해도 잠시나마 아름다운 풍경의 주인공이 되는 기분을 만끽했을 테니 나쁜 경험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달콤한 영화와 소설만 있는 게 아니라 무미건조하고 비루하고 창피하고 심하게는 참혹한 영화와 소설이 존재하고 우리가 늘 겪어내는 일상 역시 그러해서, 아름다운 가상의 이야기보다는 가능한 한 피하고 싶은 찝찝한 가상의 이야기가 우리와 가깝게 붙어 다닌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어설픈 가상의 인물은 우리와 어찌나 닮아 있는지 거부하고 싶어도 그의 얼룩덜룩한 행적을 똑같이 따라하게 된다. 없던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는 문제는 더 크게 키우는 그와 비슷하게, 문제를 주체하지 못 할뿐더러 실수로 문제를 크게 키우는 일이 다반사다. 얄궂은 블랙 코미디에 우리의 삶이 가감 없이 담겨 있다고 말하는 게 그런 이유인지도 모르겠지만.
엘리베이터에 끼인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소설가 김영하의 단편소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은 작중인물 ‘나’가 아침 출근길에 겪은 사건을 다룬다.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선 나는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15층부터 1층까지 부랴부랴 내려갔는데, 알고 보니 엘리베이터는 문이 열린 상태로 6층과 5층 사이에 멈춰 있었고 엘리베이터 아래로 사람 다리 두 개가 데롱거리고 있었다. 나는 엘리베이터에 낀 그를 불러본다. 하지만 시계를 보니 여덟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고, 구해낼 힘도 시간도 없어 그를 외면하고 지나친다. 얼른 119에 신고하겠다는 생각으로.
하지만 경비실에는 아무도 없었고,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핸드폰을 빌려달라고 청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 또 하는 수 없이 버스를 타려 하는데 하필이면 지갑을 두고 왔다. 일단 내리라는 버스기사와 실랑이하던 중 갑자기 트럭이 버스의 앞면을 들이박는다. 이어서 탄 버스에서도 치한으로 몰려 내리게 되고, 결국에는 충정로부터 회사가 있는 시청까지 뛰어간다. 회사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엘리베이터가 멈춰버린다. 우여곡절 끝에 구조된 나는 그날 하기로 되어 있던 ‘이면지 사용과 화장지 절감 방안’에 대해 발표를 한다. 이후에도 불운 몇 차례를 더 겪게 되는데, 그제서야 나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끼여 있을 그 사람을 다시 떠올린다. 바로 119에 전화를 건다. 한데, 전화를 받은 담당자로부터 관할 소방서에 연락해보라는 대답만이 돌아온다. 결과적으로 작중인물 나는 엘리베이터 낀 그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 했고 어떤 도움도 주지 못 했다. 나는 집에 도착해서 그 남자를 생각한다. “‘아, 그래서 지금도 나는 궁금하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됐을까.’”*
김영하가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를 그도 아니고 철수나 영희도 아니고 나로 설정한 것은 우리 모두가 작중인물 나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음을 말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실제로 나는 이 가상의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상황과 비슷한 경험을 했다.
갑작스러운 사고
경의선이 풍산역을 지날 때였을 거다. 내 앞에 서 있던 한 20대 여자가 갑자기 쪼그려앉았다. 처음에는 그저 다리가 아픈 것이겠거니 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숨쉬기조차 힘들어하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걱정되었는지 의자에 앉아 있던 중년의 남자가 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는 자리에 앉아서도 연신 식은땀을 흘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태가 악화되는 것처럼 보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갔다.
그런 차에 내 옆에 서 있던 다른 여성 한 분이 뭐라도 해보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어떡해요, 119라도 불러야 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말했고, 얼떨결에 책임감을 느끼게 된 나는 긴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연락을 취할 곳이 적혀 있는 안내판을 찾기 위해 분주하게 두리번거렸다. 바로 근처에 안내판이 있었고 거기에 연락처가 나와 있었다. 그런데 빠르게 이동하는 만원 열차에 있기조차 힘들었는지 그는 열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마자 밖으로 나갔다. 화전역이었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문을 닫고 출발하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역사 안 벤치까지 힘겹게 걸어가는 그를 바라봤다. 걱정이 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모종의 책임감이 느껴져 안내판에 나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숨 쉬기조차 힘들어하는 사람이 화전역 안 벤치에 앉아 있다고 전했다. 빨리 내려가서 확인해달라고.
기분이 못내 찜찜했다. ‘설마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만에 하나 화전역 직원이 내 전화를 별일 아닌 듯이 넘기고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지 않았으면 어떡하지?’ 지하철이 화전역에서 홍대입구역까지 가는 십여 분 동안 걱정과 불안함이 떠나질 않았다. 홍대입구역에서 내려 회사로 걸어가면서도 그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걱정과 불안함은 이미 후회와 미안함의 감정이 되어 있었다. 차라리 그때 내가 같이 내려서 도왔더라면, 사람이 쓰러져가고 있는데 그깟 회사에 지각하는 게 무슨 대수라고.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야겠지만, 그 사람이 잘못되었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엄습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 사실을 평생 모르고 살아가겠지만, 이미 죄책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였다. 114에 전화해 화전역 사무실의 번호를 물어봤다. 그리고 화전역에 전화를 걸어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봤다. 정말 다행히도, 담당자가 그의 부모님이 역에 찾아와서 그를 집에 데려갔다고 말해줬다. 나는 그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저 감사하다고 말할 수밖에
만약에, 아주 만약에 누군가 전화해서 찾아왔다는 역 직원의 이야기를 들은 그가 나의 행동에 고마움을 느꼈다면 무척이나 민망할 것 같다. 사실 착한 일을 한 건 내가 아니라 그에게 선뜻 자리를 양보한 중년의 남성과 애타는 표정으로 나에게 뭐라도 해보라고 말한 여성, 그리고 신고 전화를 받고 당장에 역사로 내려간 담당 직원이다. 나는 단지 얼떨결에, 그들을 대신해서 전화했을 뿐이다. 물론 나 역시 그가 걱정되었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했다. 하지만 그때 무엇보다 다행이라고 생각한 건 내가 그에게 더 이상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의 화자가 느낀 미안함, 후회, 자학의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니 말이다. 오히려 고마움을 느껴야 할 사람은 나인지 모른다.
운이 좋았다. 나는 소설 속 화자는 갖고 있지 못했던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감사하다. 소설 속 상황과 달리, 나에게는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었으니 말이다.
* 김영하,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문학과지성사, 1999, 1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