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즉,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노약자가 아님에도 노약좌석에 앉는 사람과 어떤 일이 있어도 노약좌석에 앉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구분이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도 아니란 소리인가?’ 평생 지하철과 버스를 한 번도 이용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은 사람, 항상 자가용만 타고 이동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정정이 필요할 것 같다. 대중교통을 자주 이용하는 사람은 두 유형으로 나뉜다. 노약자가 아니지만 노약좌석에 빈자리가 생기면 앉는 사람과 노약좌석이 텅텅 비어 있어도 앉지 않는 사람.
나는 앉는 쪽이다. 물론 빈자리가 생기자마자 염치없게, 주린 배를 움켜지고 거닐다가 운 좋게 먹이를 발견한 맹수의 왕 사자나 호랑이처럼 자리가 나자마자 달려드는 건 아니다. 하이에나에 가깝다. 먼저 주변을 유심히 살핀다. 남들이 다 앉고 난 뒤에도 자리가 남으면, 주변에 있는 사람이 자리 앉지 않으면 그제야 의자에 은근슬쩍 엉덩이를 들이미는 것이다.
노약좌석이라도 빈자리가 생기면 앉게 된 것은 2년 전 지하철 3호선에서 나에게 비어 있는 노약좌석에 앉으라고 권한 한 할아버지를 만난 이후다. 하루는 늦은 시간에 지하철을 탔다. 공부하느라 그런 건 아니고 술을 먹느라. 열차 출입문 근처에서 알코올이 잔뜩 섞인 뜨거운 숨을 퍽퍽 내쉬고 있는데 노약좌석에 앉은 그 할아버지가 인자함과 친절함을 머금은 얼굴로 자기 옆 빈자리에 앉으라며 손짓했다. 여기서 그쳤으면, 감사하지만 괜찮다는 말로 정중히 거절했을 텐데 할아버지는 나를 보고 어리고 착실한 데다 똑똑한 손주가 떠올랐는지(만약 그랬다면 그 손주 뿐께 무척이나 죄송해집니다만), 교장 선생님의 훈화 같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밤낮 없이 열심히 공부하느라 피곤한 학생이 자리에 앉아야지”라는 말로 포문을 열었다. 밤낮 가릴 것 없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므로 민망함 한 숟가락. 이어서 할아버지는 격려와 기대를 잔뜩 실은 목소리로 “청년들이 튼튼하고, 공부 열심히 해야 나중에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고 한국을 선진국으로 이끌지, 얼른 앉아!”라고 말했다.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이, 한밤중의 지하철에서 졸던 사람들의 눈길이 하나둘 이쪽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졸지에 국가 발전을 이끌 전도유망한 역군이 된 나는 민망함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창피도 창피지만, 우습게도 한편으로는 취기로 피곤하기도 했고 ‘어,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네’ 하는 생각이 들어 일단 앉았다. 청년이라는 말만큼 부끄러움과 동시에 떳떳함을 느끼게 하는 말도 없는 것이다. 잠깐의 부끄러움으로 얻은 편안함은 무척이나 달콤했다. 옆자리의 동료가 된 나에게 할아버지는 내리기 전까지 학교는 어디 다니느냐, 나이는 몇 살이냐, 졸업하고 뭘 할 거냐 따위의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나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국가 발전을 이끌 젊은이 역할에 충실히 임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할아버지가 말한 젊은이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일은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임신부라뇨?
아무튼, 그날 이후로 노약좌석에 빈자리가 생기면 앉는 유형의 인간이 되었다(어찌 됐든 아직은 청년이니까). 일단 앉고 나이 많은 어른이나 임신부 등 배려가 필요한 사람이 보이면 바로 친절한 미소를 띠며 양보하는 것이다. 청년다운 패기로 이 얘기를 친구에게 했더니 돌아온 대답은 “설령 그럴 경우가 벌어진다고 치자. 그런데 네가 무슨 수로 알아볼 건데?”였다. 양보는 무조건적인 미덕, 나아가 교양 있는 시민의 의무이자 필수조건이 아니었나. 순간 나는 예상하지 못한 시험문제 새로운 문제를 맞닥뜨린 고등학생처럼 땀을 비질비질 흘렸다. 찬찬히 따지고 보면 버스나 지하철에서의 양보라는 게 애매한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중교통에서 어른과 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고마운 일일 수도 있지만 통탄할 일일 수도 있다. 예의바름과 도를 넘은 참견은 한 끗 차이다.
우선 노약자가 누구인지 불분명하다. 단순히 얼굴만으로 나이를 가늠하기 쉽지 않다. 나이가 많지 않은데 노안인 사람도 있고 반대로 나이가 많지만 동안인 사람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 옷차림새, 그리고 건강 프로그램에서 패널들을 대상으로 자주 측정하는 신체나이까지 더해지면 외형만 보고 나이를 판단하는 건 일류 관상가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또한 임신부인지 아닌지 분별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배가 나왔는데 그게 임신 때문인지 방금 전에 밥을 많이 먹고 나와서인지 좀처럼 짐작하기 어렵다. 『한겨레』의 한 기자는 지하철에서 임신부로 오해받은 에피소드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때의 기분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때의 심정이란 ‘어이없음, 황당, 허망, 자책, 슬픔…’ 차라리 분노가 치밀었다면 좋으련만.”* 그리고 잠시 뒤, 그가 임신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양보를 권한 사람도 임신부로 오해하게 만든(?) 그도 서로 죄송하다고 말하며 민망해했다고 한다.
잠시, 여기서 천천히 숨을 고르고 목을 잠시 풀고 말할 게 있는데, 이렇게 세세하게 걸고넘어지는 게 양보하기 싫어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 기분 좋은 양보를 실천하기 위한 실존적 고민이다.
진짜 양보라면……
상대방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으면서 자리를 권하는 방법은 상대방에 먼저 물어본 뒤 양보하는 것이다. 공부용보다는 수면용에 어울리는 교과서에서나 나올 법한 지루한 말이지만, 사실이 그러니까요. 그리고 모두에게 이로운 양보를 위해서는 중요한 요소가 하나 더 필요한데, 바로 운이다. 자리를 양보했는데 한두 정거장 뒤에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목적지에 도착해서 내리는 것이다. 이럴 경우 양보한 사람은 바로 의자에 앉아서 쉴 수 있어 좋고, 양보를 받은 사람은 ‘에이, 어차피 자리 날 거였잖아’ 하고 가볍게 여길 수 있어 부담이 없다. 주는 사람은 아쉽지 않고 받는 사람은 미안함을 느낄 필요가 없으니 금상첨화다. 자리를 권할까 말까 전전긍긍하다가 적당한 타이밍을 잡지 못해 양보할 기회를 빼앗겼지만 몇 정거장 뒤에 내린 옆자리의 사람도 결과적으로 자리를 양보한 셈이 되니 편한 마음으로 남은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친절과 선행의 핵심은 배려를 받는 상대방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배려를 전한 사람도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작은 선행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은연중에 미안함을 느끼게 해 지나친 감사를 표하게 만들거나, 그러한 감사에 자아도취에 빠지게 되고 잘난 척하게 되는 선행은 선행이라 부르기 힘들지 않을까. 못내 불편하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고마움 못지않은 불편함이 담겨 있는 도움을 건네는 것과 도움을 주지 않는 쪽 중 진정으로 상대방을 위한 일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테고, 훗날 지금의 태도를 반성하고 철회하게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의 내 생각은 그렇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렇게 진지하고 심각해져버렸는지 모르겠네요. 아무리 그래도 대중교통 하면 양보 아니겠습니까. 노약자와 임신부에게 자리를 양보합시다. 사실, 누구나 아는 이 당연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쓸데없이 길게 늘어놓았습니다.
* 김미영, 「임신부라뇨?」, 『한겨레』, 2016. 1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