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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레이 Feb 08. 2017

통근 일기: 12.죄송하지만, 깨워주시면 안 될까요 ?

나는 잠이 많은 아이였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자세도 가리지 않았다. 엉덩이와 머리, 또는 둘 중 하나라도 기댈 곳이 있으면 닿음과 동시에 잠과 조우했다. 잠이 내게 오는 건지 내가 잠에게 찾아가는 건지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잠의 블랙홀에 순식간에 빨려들어갔다. 중학생 때는 음악 시간에 노래를 한창 부르던 중 잠이 들어 선생님과 주변 친구들을 경악시킨 적도 있었다. 밤새 공부를 한 것도, 허튼 짓(?)을 한 것도 아니었다. 잠에 들기까지의 여정이 다른 사람에게는 바가지로 욕조에 물을 채우는 만큼의 시간이 걸린다면, 나에게는 소줏잔을 채우는 일 정도에 불과했다. 최근에는 어찌 된 일인지 잠을 설치기도 하고 약간의 불면증을 겪어 잠을 쉬이 이루지 못하는 고통이 무엇인지 조금은 깨닫게 되었는데, 그래도 기본적으로 많이 자고 잘 잔다. 

 이불과 방바닥, 침대가 들으면 섭섭해할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가장 자주 그리고 즐겨 잠을 청한 장소는 버스였다. 팔자에 없는 시골길을 달리느라 조금 덜컹거리긴 해도, 버스는 언제나 따뜻한 요람이 되어주었다. 세 살 버릇 남 못 주는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의자에 앉자마자 잠드는 것은 물론이고 서서 자는 것도 거뜬히 해낸다. 상황이 이쯤 되면 누구는 기면증이 아닌지 걱정하고, 또 누구는 부러운 눈빛으로 감탄을 자아내는데, 시도 때도 없이 잠에 빠지는 패턴과 주변에서 하는 이런저런 이야기에 익숙해졌는지 이제는 설핏 미소를 지으며 어물쩍 넘어가는 방법을 터득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런데 정말로 기면증면 어떡하나 싶어 조금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한번 검사를 받아보고 싶기도 한데, 기면증으로 매주 통원 치료를 받고 혹 입원까지 하게 된다면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 것 같다. 병원으로 향할 때마다 ‘이런 걸로 병원에 가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계속해서 맴돌지 않을까.


기면증보다 무서운 건

 잠으로 인한 예기치 못한 골칫거리는 기면증처럼 거창한 게 아니라 아주 사소하지만 매우 현실적인 부분에서 발생했다. 자느라 목적지를 지나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시험기간을 맞아 모처럼 공부 좀 해보려 새벽같이 버스를 타면 수면의 일일 할당량을 채우겠다는 본능이 발동했는지 학교를 훨씬 지나친 뒤에야 잠에서 간신히 깼고, 심한 경우에는 종점에서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버스를 청소하러 오신 아주머니가 깨워주지 않았다면 끝도 없이 잤을 거다. 

 물론 지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술을 먹는다는 것뿐. 술을 먹고 지하철을 탄 날이면 종착역인 문산역에 도착해서도 어김없이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빠져나간, 고요한 지하철은 숙면을 취하기에 그만인 것이다. 사실 이는 역에서 집까지의 거리가 걸음으로 가능한 수준이라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숙면으로 얻은 상쾌함 덕에 기분이 좋아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슬프게도 우리 집은 역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 들어가야 한다. 막차도 금방 끊겼다. 끝이 ‘리’로 끝나는 동네의 사정이란 것이 대개 이러하다. 자연스레 택시비로 쓴 돈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통장의 잔고는 바닥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곤두박질쳤다. 



실례지만좀 깨워주시면 안 될까요? 

솔직한 심정으로는 크고 화려한 색깔의 글씨로 ‘문산역에서도 자고 있다면, 좀 깨워주세요’라고 쓴 도화지를 매일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잠에 빠질 것 같다 싶으면 얼른 꺼내(순식간에 수면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므로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가슴팍에 올려놓고 싶다. 이참에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슬몃슬몃 올라오기도 하는데, 창피해서라도 잠에 들지 못할 것 같다. 오호, 잠 퇴치에 의외로 효과적일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또 이런 건 어떨까. ‘종착역에 이르러서도 잠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깨워줍시다’는 표어를 만들고 지하철 내에서 대대적인 캠페인을 펼치는 것이다. “무슨 수로?”라고 물으신다면 달리 방도가 떠오르지 않지만 일단 제안해보는 것이다. “1인 시위라고 하겠다는 건가?”라고 또 물으신다면 그럴 만한 패기는 없지만 아무튼 상상해보는 것이다. 호기롭게 얘기를 꺼내긴 했는데 금세 주눅 들고 말아버렸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요즘 지하철에서 나오는 표어나 홍보 영상보다는 낫잖아요!” 지하철과 버스정류장에 등장하는 표어와 캠페인을 보고 있으면 어이없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치기로 무장한 반항심이 솟아올라 일부러라도 반대로 행동하고 싶어진다. 지금은 나오지 않는 것 같은데, 가장 황당무계했던 건 철로에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영상이다. 한 남자가 기차 선로에 들어서자마자 육중한 기차가 들이닥친다. 화면이 잠시 정지되고 열차에서 기관사가 내려온다. 기관사가 난처한 표정으로 철로에 뛰어든 그 남자에게 말한다. “저도 멈추고 싶었지만… 너무 늦었어요.” 그러고선 기관사는 열차에 다시 오른다. 열차가 출발한다. 철로에 서 있는 그 남자는 절규한다.  

 경각심을 주겠다는 의도는 알겠지만, 누가 봐도 사람이 죽는 걸 연상하게 되는 영상을 만들어야 했을까. 눈살이 찌푸려지는 잔인한 방식으로 보여줘야 했는지 의문이다. 철도 사고를 당한 사람에 대한 고려도, 기관사의 감정에 대한 배려도 없는 영상이다. 누구는 직관적이라서 좋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세심한 주의가 선행되었다면 보다 친절하고 다정하고 유쾌한 캠페인이 나왔을 것이다. 또한 그런 영상이 과연 철도 사상사고를 줄이는 데 일조했을까. 아닐 거다. 불편한 기분을 못내 지우기 힘들다.

 어쩌면 그 영상을 이렇게나 선명하게 기억하는 나를 두고 영상 제작자와 철도 관계자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기분에 흐뭇해할지도 모르겠다. 재기발랄한 소설가 다나베 세이코는 이런 말한 적이 있다. “전시戰時 중에는 표어가 많았다. 그중 내가 가장 싫어했던 표어는 ‘낳아라, 번식하라’였다.”* 말이 전하는 내용은 다르지만, 말하는 방식이 과격하고 노골적이며 난폭하고 공격적인 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에 비하면 열차가 종착역에 이르렀음에도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사람을 깨워주자는 표어는 온순하고 귀엽지 않은가. 게다가 도움을 주는 입장에서는 행동하는 데 많은 품이 들지 않으며,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는 크나큰 고마움을 느낄 뿐만 아니라 그 호의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언젠가 마주칠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 종착역에 도착한 지하철에서 졸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게 하는 친절 어린 용기의 연료가 되어준다. 귀찮음과 무관심을 밀어내고 간신히 끄집어낸 용기가 훗날 나에게 또 다른 친절로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누군가로부터 받은 도움의 기억과 비슷한 경험에서 시작된 공감이 무한히 커진다면, 술기운 혹은 피곤함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종착역에서 내리지 못하는 불상사를 겪는 사람이 없게 되지 않을까. 


그저 부끄러울 뿐이지만   

 물론 내가 제때 내리지 못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걱정 없이 안방 마냥 지하철에서 맘껏 잘 수 있는 건, 그리고 거리낌 없이 이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건 내가 20대 남성인 까닭이다. 여성이라면 얘기가 달라질 것이다. 여성에게 지하철만큼 불쾌감을 일으키고, 위험한 곳도 없다. 타는 순간부터 주변의 시선에, 심하게는 악의적인 신체접촉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나 역시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사이, 누군가에게 피해 또는 불쾌감을 준 적이 있을 거다. 그들에게 지하철은 어쩔 수 없이 이용하지만, 가능한 한 빨리 탈출하고 싶은 공간이다. 늦은 시간 지하철에서 아무 걱정 없이 편히 잘 수 있는 건 남성만이 가진 공정하지 못한 특권인지도 모른다. 이런 마당에 자고 있는 다른 사람을 깨워주자는 캠페인 운운하는 건 꾸지람 들어야 마땅하다. 거나하게 취해 술주정을 늘어놓으며 졸고 있는 남자를 마주치면 나 역시 이유 불문하고 자리를 슬슬 피하게 되니 말이다. 

 결국에는 다른 사람이 일상적으로 겪는 고통과 불편은 무관심 속으로 던져버린 채 어쩌다 걸린 감기에 징징거리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물을 엎지른 듯 머릿속이 얼룩덜룩 복잡해진다. 반성과 고민이라는 이름을 한 수건으로 찬찬히 얼룩을 지워나가다 보면 나름의 답이 보이게 될까요? 물론 오래 걸리고, 쉽지 않겠지만요. 우선은 무엇보다 밝은, 하지만 저에게 밝게 보인다는 이유로 그 밝음이 밝게 보이지 않는 사람, 그 밝음에서 비껴나 있는 사람을 은연중에 배제해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는 그런 밝음을 가진 그런 표어를 고민해봐야겠습니다.   




* 다나베 세이코, 『여자는 허벅지』, 조찬희 역, 바다출판사, 2016, 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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