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과의 대화 중 나온 얘기다. 통근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통근 중 발견하게 되는 추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그는 지하철과 버스에 다른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는 지저분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왜 그리 많은지 불만을 털어놓았다. 전화하며 침 튀기는 사람, 귀 후비는 사람, 머리 긁는 사람, 눈곱 떼는 사람, 코 파는 사람 등. 그는 가두시위를 주도하는 이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등장하는 분비물의 크기와 불결함이 커질수록 목소리에 더 많은 짜증이 묻어나왔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 하나 없었거니와 나 역시 그런 광경을 숱하게 목격했으므로. 그런데 한쪽에서는 나도 그런 적이 있지 않았었나, 오늘 혹시 지하철에서 귀를 후비거나 비듬을 털지는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과 부끄러움이 여기저기서 나를 찌르기 시작했다. 혹 내가 규탄의 대상이 되는 건 아닐까. 불특정 다수를 지칭하는 그의 말이 마치 나에게 꽂히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나는 그런 적이 없음을 나도 그런 일이 너무나 싫음을 증명하고 싶었는지, 그가 던지는 말의 장단에 맞춰 고개는 평소보다 크고 빠르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반대로 고개를 제외한 나머지 신체 부위, 특히 손과 팔은 고맙게도 평소의 산만함을 잘 참고 탁자 위에 얌전히 붙어 있었다.
그 많은 분비물이 손수건이나 휴지에 고이 담겨 분비물의 주인과 함께 지하철을 조용히 빠져나갔다면 이러한 얘기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 역시 공연히 찔릴 일도 없었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여간해서는 벌어지지 않는다. 기대하지 않는 편이 심신에 이롭다. 자신의 흔적을 어떻게든 남기고 싶은 걸까. 많은 이들이 가상의 경쟁자를 상대로 민들레 꽃씨 날리듯,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온 일부를 손가락을 모아 튕기고, 의자에 묻히고, 입으로 후 불어서 주변에 흩뿌린다. 마치 ‘더 멀리, 더 더럽게’가 목표인 양.
방귀, 피할 수 없는 또 다른 문제
다행스럽게도 타인의 분비물이 주변에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경우는 자주 발생하지 않는다. 잘만 하면 피할 수 있다. 또한 귀나 코에서 나온 분비물을 사람을 향해서 대놓고 쏘는 사람이 별로 없고, 다른 사람이 분비물을 끄집어내는 광경이 보기 싫으면 차선책으로 시선 회피라는 방법도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란한 상황은 타인의 몸에서 나온 그 무엇을 피할 도리가 없을 때다. 방귀에 대한 얘기다.
지하철과 버스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방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승객 전부 무방비로 노출된다. 폐활량에 관한 한 최고의 능력을 자랑하는 수영선수라고 해도 별수 없다. 숨을 참아야 할 필요성을 깨닫는 순간 이미 누군가가 배출한 가스가 코를 통해 내면 깊숙이 들어온 것이니 말이다. 맡았는가? 안타깝지만, 이미 몸에 들어온 것이다. 기본적으로 후각은 불쾌함과 밀접하게 닿아 있다. 물론 ‘좋은 향기’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대부분은 불쾌감을 유발하는 인체의 냄새를 없애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리고 후각의 작동은 막을 수 없다. 보기 싫은 광경은 눈을 감으면 그만이고, 만지기 싫으면 안 만지면 된다. 하지만 맡기 싫다고 냄새를 안 맡을 수 있을까. 개코는 불행하다.
더 큰 문제는 범죄는 명백히 드러나는 반면 범죄자는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공장소에서 코를 파는 행위, 코딱지를 바닥에 내던지는 행위는 범죄와 범죄자가 명명백백하다. 눈총을 주거나 눈살을 찌푸리는 방식으로 눈치를 줄 수라도 있다. 불쾌감을 표현하는 무언의 메시지가 가능한 것이다. 한데, 방귀와 방귀 뀐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분간되지 않는 상황. 냉혹한 형사 반장이 되어 한 사람 한 사람 붙잡고 추궁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되레 손가락질 당할지도 모르니, 그저 참는 수밖에.
그래서인지, 후각과 냄새의 고유한 특성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사람이 꽤나 많은 것 같다. 여기저기서, 익숙하지만 좋아할 수는 없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나의 몸에서 나온 냄새도 싫은데 남의 몸에서 나온 냄새는 오죽하랴.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 난데없이 등판하거나 ‘나만 당할 수 없지’ 하는 심리가 곳곳에서 튀어나온다면, 후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생지옥이 따로 없을 게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아쉽지만 냄새의 특성이 그러하듯, 개개인의 보이지 않는 양심에 맡기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인다. 방귀를 뀐다고 해서 체면을 잃지는 않지만 양심에는 분명 찔릴 테니 말이다. 지하철과 버스 광고판에 ‘공공장소에서는 방귀를 참읍시다’라고 표어를 붙이는 것도 뭔가 우습다. 나부터가 ‘뭐 저런 걸 굳이 표어로 만들지’ 하고 비웃을 것 같다.
당신의 옆에 앉은 사람이 포르노를 본다면
영국의 한 자녀 양육 관련 웹사이트 멈스넷(Mumsnet)에 올라온 한 게시물은 열띤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오늘 여자 동료에게 들은 말인데, 열차에서 옆에 앉은 남자가 아이패드로 포르노 사진을 보고 있더래요. 그러지 말라고 부탁했는데도 거절하더래요. 제 생각에는 동료의 행동이 상당히 용감했던 것 같아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게시물에 달린 수백 개의 답글 대부분은 간섭과 지적을 옹호하는 쪽이었다고 한다.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경찰에 신고하라는 의견도 있었다.
무척이나 황당한 상황이다. 지하철에서 포르노를 본 적은 없지만, 선정적인 요소가 다분한 웹툰이나 영화를 보는 등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사이 주변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는 행동을 저지르는 가해자가 된 적이 없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만약 이러한 일이 당신에게 벌어진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위의 사람처럼 용기를 내 간섭하든가, 불쾌함과 짜증이 치밀어 올라와도 참든가 피하든가. 나 또한 쉽게 용기를 내지 못할 것 같다. 간섭했다가 예상치 못한 불똥이 날아올지 모른다.
그렇다고 먼 나라에서 벌어진 에피소드라고 치부하고 모른 척 지나갈 수 없다. 이웃한 중국에서도, 그리고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 적이 있다고 한다. 시내버스에서 포르노를 보던 중국인은 주변 승객의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20여 분 동안 포르노를 보다가 내렸고, 퇴근 시간 무렵 만원인 지하철에서 포르노를 본 한국인은 심지어 이어폰 없이 볼륨을 켜놨다고 한다. 이런 일에 비하면,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코를 파거나 방귀를 뀌는 일은 애교로 보일 지경이다.
『출퇴근의 역사』의 저자 이언 게이틀리는 이렇게 말한다. “멈스넷의 한 회원이 지적한 것처럼, 열차의 객실은 ‘사유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 한국도 지하철과 버스를 비롯한 대중교통이 사유 공간이 아니라는 점은 다르지 않다. 이처럼 추악한 일을 저지른 사람 역시 이를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 괘씸하다. 공공장소에서 포르노를 본다고 해서 법적 처벌을 받지 않으리라는 점을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디까지 개인의 자유의 영역이고, 어디서부터 공공 예절과 법의 영역인 걸까. 마음 같아서는 대중교통 이용 중 포르노 시청을 금지하는 법이라도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가능할 것 같지 않다. 그저, 그런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수밖에….
* 이언 게이틀리, 『출퇴근의 역사』, 박중서 역, 책세상, 2016., 291쪽.
⁑ 이언 게이틀리, 『출퇴근의 역사』, 박중서 역, 책세상, 2016., 2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