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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레이 Jun 18. 2017

통근일기: 16. '미남'과 '구루프'

누구든 집 밖으로 나선 순간 타인의 시선에 노출된다. 내 눈에 타인이 보이듯, 타인의 눈에도 똑같이 내가 보이게 된다. 외딴 섬에 혼자 살지 않는 이상 타인의 존재와 그들의 시선의 영향을 받는 일은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영향이 미치는 정도는 장소에 의해 많은 부분이 결정된다. 집 근처에 나갈 때와 번화가에 나갈 때를 비교해보자. 집 근처에서는 무릎이 나온 추리닝, 목이 늘어난 티셔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돌아다녀도 스스로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반면 번화가를 나설 때 후줄근한 옷을 입는 일은 왠지 모르게 꺼려지게 된다. 번화가에서 약속이 잡힌 친구와의 모임에 나가기 위해 몇십 분 동안 옷장과 거울 사이를 반복해서 오가며 어떤 여러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한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번화가에 찾아가는 이유는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타인의 시선을 은근히 즐기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볼 때 지하철과 버스는 참 애매한 장소다. 지하철과 버스를 탄다는 것은 특정 목적지를 향하여 간다는 의미이다. 누구에게는 학교나 직장일 수도 있고, 또 누구에게는 친구와의 약속이나 연인과의 데이트 장소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목적지에만 안전하고 빠르게 도착한다면야,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춰지든 그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은 일일 텐데 그게 또 자로 선을 긋듯 똑 떨어지지 않는다. 

 한 번은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시인 이우성의 시집 『나는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왔어』를 읽은 적이 있다. 책을 펴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얼굴이 화끈거려 책을 덮고 싶었다. 책의 내용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시집의 강렬한 제목.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왔다니, 주변 사람들이 시집의 제목과 내 얼굴을 번갈아 훑은 뒤 비아냥거리며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얼씨구,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오셨어요?” “그 얼굴로,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지내느라 꽤나 고생했겠구먼.” “지금 이 나라에서는 좀 살 만해요?” 신기한 제목에 이끌려 산 시집. 그 대가는 가혹했다. 겁도 없이 나의 얼굴로는 감당 못하는 모험을 택한 것이었다. “강동원, 정우성, 장동건도 한국 사람이거든요!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게 제가 미남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잖아요!”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더 큰 웃음거리가 되기 싫으면 조용히 읽는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상황이 한 차례 더 있었다. 나를 ‘미남’이라고 주장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파장과 물의를 일으킬 만한 책, 마광수 교수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를 읽을 때였다. 변태로 몰리기 딱 좋은 꼴이었다. 제목과 마광수 교수의 이미지만으로 이 책을 속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 책을 읽고 있던 나를 이상하게 눈빛으로 바라볼 사람을 설득하는 건 요원한 일. 이래서 일본 사람들은 책을 산 뒤 표지를 종이로 덧씌워 제목을 가리는 것일까.     



나만 몰랐던 이야기

개인이 공연에서 이상적 기준을 표현하려면 그 기준과 어긋나는 행동은 그만두거나 감추어야 할 것이다. 표현 기준에 어긋나지만 어떤 식으로든 만족감을 주는 행동이면 몰래 즐긴다. 이를테면, 미국 사회에서 여덟 살 난 아이는 대여섯 살짜리들을 겨냥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따위에는 관심 없노라고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아무도 몰래 그런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 어빙 고프먼, 『자아연출의 사회학』, 진수미 역, 현암사, 2016., 59쪽.     

 여덟 살짜리 꼬마도 직감적으로 아는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다. 인생을 헛 살았다고 푸념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경솔한 행동인 건 분명했다. 지나치리만큼 자신감 넘쳐 보이는 제목의 시집과 변태라는 오명을 쓴 작가의 파격적인 주장이 담긴 책을 지하철에서 읽는 행위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 예배가 한창 진행 중인 예배당에 반짝이 옷을 입고 간 꼴과 다를 바 없으니 말이다. 정 읽고 싶다면 몰래 집에서 읽어야 했다. 지하철에서 읽을 책으로 골라도 하필이면 그런 책을 고르다니, 차라리 잠을 자는 쪽을 택했어야 했다.

 출퇴근길을 오가며 책을 읽는 것이 꼭 불특정 다수의 남에게 잘 보이려는 뜻은 아니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출퇴근 시간을 그냥 보내기 아쉬워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게 목적이라면 꼭 독서가 아니라 다른 일을 해도 된다. 하필이면 왜 책일까? 많은 이들이 카페에 앉아 책을 보는 이유가 이에 대한 답을 대신 해준다. 카페에서 차를 천천히 마시며 독서에 집중하는 모습이 묘하게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듯, 출퇴근길의 독서 행위로 피곤한 와중에도 책을 보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연출하는 것이다(물론 다른 사람이 저의 의도대로 바라봐줄지 확신할 수 없지만 말이죠).   

 밖에 나갈 때 아무래도 옷차림에 좀 더 신경 쓰듯, 밖에서 책을 볼 때는 왠지 표지와 제목에 신경이 쓰인다. 타인의 평가와 인정을 고려하는 것은 피곤한 짐이 되기도 하지만 묘한 흥분을 주기도 한다. 타인이 바라보는 나를 상상하며,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세트를 연출함으로써 우리는 야릇한 쾌감을 느낀다. 그렇게, 직접 대화를 나누거나 접촉하지 않지만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타인이 바라보는 나를 상상하는 즐거움은, 우리를 독서실과 조용한 방이 아닌 밖으로 향하게 한다. 사방이 탁 트인 세트장에서 우리는 산뜻하고 세련된 역할을 맡은 한 명의 배우가 된다.      


지하철에서 초연히 구루프로 머리를 말고 있는 여자

반대로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지하철에서도 집에서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 아침 출근길 버스와 지하철에서, ‘구루프’로 머리에 단단히 고정시킨 채 초연하게 앉아 있는 여자를 떠올려보자. 구루프를 만 모습을 처음 봤을 때는 그 물건의 이름을 몰랐을뿐더러 우스꽝스럽게 느껴져 보는 나조차 어색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하게 됐다. 남자는 여자든 머리에 ‘뽕’이 들어갔을 때와 안 들어갔을 때의 차이는 머리를 감고 안 감고의 차이만큼 크지 않을까. 결혼식처럼 중요한 자리에서 소위 말하는 ‘후까시 머리’를 위해 괜히 시간과 돈을 쓰는 게 아니다. 

 전혀, 라고 말하기는 힘들어도 이들에게 주변 승객의 시선은 관심 밖의 일이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도착할 장소, 그리고 그곳에서 만날 사람의 시선과 평가가 더 중요하다. 애인이나 친구, 혹은 회사 사람이나 새로운 장소에서 스치게 될 수많은 사람일 수도 있다. 그들에게 지하철과 버스는 목적지로 가게끔 도와주는 수단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니, 그 안에서 부대끼고 부딪히는 사람은 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 안에서 타인의 눈을 의식해 긴장을 하고 옷매무새를 다듬고 행동거지를 신경 쓰기보다는 집에서 있는 것처럼 편한 태도를 취하는 쪽을 택한다.

 이처럼 지하철과 버스를 비롯한 대중교통이라는 장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저마다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행위로 채워진다. 교통수단이라는 간단한 말로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 목적과 수단 사이 어디쯤에 자리하고, 집단적인 장소인 동시에 개인적인 장소이며, 집과 업무·놀이 영역의 경계에 놓여 있다. “공간은 사회적으로 구성되면서 동시에 사회를 구성하는 실천 형식”*이다. 그렇기에 지하철과 버스는, 누구에게는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이 다른 이에게 어떻게 보일까 전전긍긍할 만큼 타인의 시선의 압박을 느끼는 장소이지만, 반면 누군가에게는 다른 이가 어떻게 바라보든 이후의 장소에서 완벽한 모습을 연출하기 위한 준비 장소이기도 한 것이다. 사회학자 김찬호는 “길거리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에 있는 제3의 공간, 업무와 일상의 굴레에서 풀려나는 완충지대”⁑라고 표현했는데, 주어가 길거리 대신 지하철과 버스로 바뀌어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     


한편지하철은 좋은 짝을 찾기에 최적의 장소? 

 여기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더 있다. 지하철은 좋은 짝을 만나기에 최적의 장소라는 점이다. 물론 이론적으로 그리고 인구통계학적으로는 말이다. 러시아워에 지하철을 이용하는 사람은 알 것이다. 도처에 젊은 남녀로 가득하다. 버스에서 여자가  밟자 “한 번만 더 밟으면, 데이트 신청할 겁니다”라며 남자가 농담을 거는 공익캠페인이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지하철과 버스에서 사랑의 싹을 틔운 커플이 부지기수일 것 같다. 

 실제로 영국 빅토리아 시대 때 처음 시작된 장거리 통근은 연인을 만나고 사귀는 방식의 변화로 이어졌다고 한다. “독신자들은 통근 덕분에 두 곳에서 살 수 있게 되었고, 만날 수 있는 배우잣감의 폭도 넓어졌다.”⁂ 전 세계의 수많은 인생 선배들이 실제로 증명하고 있는 만큼, 가능성이 열려 있다. 당장에라도 출퇴근길에 오를 때 거울 한번 더 보고 옷깃 한번 더 만져야 할지 모를 일이다.      



* 김찬호, 『도시는 미디어다』, 책세상, 2002. 

⁑ 김찬호, 『문화의 발견』, 문학과지성사, 2007, 246쪽.

⁂ 이언 게이틀리, 『출퇴근의 역사: 매일 5억 명의 직장인이 일하러 가면서 겪는 일들』, 박중서 역, 책세상, 2016., 289쪽. 


썸네일 이미지: The Subway Scene(New York City, NY USA) by Mauriz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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