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보통 일 또는 직업과 관련이 없는 걸 꼽고, 나 또한 그래야만 순정한 의미의 취미에 부합한다는 생각이다. 나 같은 경우는, 너무 뻔하고 흔해서 취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 민망하지만, 책 읽기가 취미다. 사실 책 보는 걸 취미라고 말하면 상대방이 ‘네가 읽어봐야 얼마나 읽겠니?’ ‘마땅한 취미가 없으니까 대충 독서라고 둘러대는 거 아냐?’ 하고 비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여간해서는 얘기하지 않지만 말이다.
한편으로는 책 보는 게 취미라고 하면 재미도 없고 사교성도 부족하고, 매일 집에만 틀어박혀서 책만 보는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해 요리나 운동 같은 되도 않는 취미를 지어내기도 한다. 이미 글러먹은 거 같지만 바이올린 켜기나 클래식 감상 같은 게 취미라면 자신감이 묻어나는 미소와 함께 내 취미는 이거다, 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얼마 전부터는 스스로 창피해하는 이 취미마저 취미라고 할 수가 없어졌는데, 단행본 출간 편집자가 되어서다. 분야와 소재가 워낙 다양해 관심에 따라 골라 읽으면 되므로 재미는 줄지 않았지만 운동선수에게는 운동이 취미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책 읽기가 취미라고 말하기엔 뭣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책 읽기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순전히 취미도 아닌 애매모호한 무엇이 되었다.
일도 아니고 취미도 아닌 둘 사이에 어중간한 위치에서 왔다 갔다 하는, 나의 책 읽기는 출퇴근길에서 이루어진다. 버스와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버스와 지하철을 타는 동안 책을 읽는다. 특별히 지적이어서도 아니고 부지런해서도 아니다. 책 읽기 말고는 별다른 취미가 없으므로 지하철에서도 으레 책을 읽는 것이다. 그리고 왕복 3시간에 이르는 통근 시간을 지루하기 않게 버티기 위해서는 책만 한 것이 또 없다. 웹툰처럼 한 편의 길이가 짧지도 않고 다음 회를 보기 위해 일주일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드라마처럼 매번 스마트폰에 넣을 필요 없다.
생각보다 잘 읽히고, 예상 외로 흥미로운
집을 나서기 전 두 권을 챙긴다. 하나는 사회과학이고 하나는 소설이나 에세이다. 한 권이 질려갈 때쯤, 다른 한 권을 새로 꺼내 읽는다.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두 권을 번갈아 읽을 수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통근 시간이 기니 말이다. 신기하게도 지하철은 책을 읽기에, 가만히 무언가에 집중하기에 꽤나 좋은 장소다.
사회학자 정수복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지하철이야말로 집중이 잘되는 독서의 장소 가운데 하나다. 지하철 바퀴가 구르는 소리,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는 다음 역 안내방송, 차량이 정지하는 소리, 객실을 가득 메운 승객들이 내는 온갖 소리 등등 소음으로 가득찬 지하철 안에서 집중이 잘되는 것은, 그 시간은 어차피 잃어버리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시간에는 이상하게 마음이 단출하고 단순해진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하철 안은 책 읽기에 좋은 장소가 된다.”
- 정수복, 『책인시공: 책 읽는 사람의 시간과 공간』, 문학동네, 2013, 170쪽.
실제로 그의 말처럼 지하철, 그리고 조금 다르지만 버스에서는 도서관에서 앉아서 책을 읽을 때보다 편한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다. 어차피 통근으로 사용되는 시간이니 책을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이다. 졸리면 자면 되고, 잠이 정 안 오면 그저 멍하니 서서 목적지까지 가면 된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하거나 노래를 들을 수도 있다.
이뿐만 아니라 대중교통을 타면서 책을 읽는 것은 묘한 쾌감을 주기도 한다. 도서관과 독서실에서는 모두 공부를 한다. 공부를 하지 않는 게 이상한 것이다. 반면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 때문에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책을 읽는 일은 왠지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한다. 다른 이의 시선이 의식되기 시작하면서 책 읽기에 더욱 열중하게 된다. 이때 근처에 미모의 여성이 서 있고, 마침 읽고 있는 책이 운 좋게(?) 철학이나 미학 책처럼 자못 심오하고 진지해 보이는 제목인 데다 잘 조준해서 내려치면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로 두꺼운 책이라면 눈과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안녕하세요. 제가 이렇게 지적인 사람입니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우리 회사 사장은 책과 원고를 읽으러 종종 지하철을 탄다고 한다. 홍대입구역과 인천국제공항역 사이를 오가는 1시간 30분 동안 책과 원고를 읽는다는 것이다. 아, 여기서 이 인간(사람을 한자로 썼을 뿐, 다른 의도는 없다)을 사장이라고 부른 것은 내가 버릇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 인간이 한 출판사의 사장이긴 해도,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그를 ‘사장님’이라고 부를 이유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건 출판사가 아무리 크고 대단하든, 출판사가 아니라 훨씬 큰 다른 회사의 사장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내가 유달리 버릇이 없거나 기회 닿는 대로 사장의 험담을 늘어놓는 녀석이라서 그런 건 결코 아니다.
출퇴근길에 안성맞춤인 책
지하철과 버스에서의 책 읽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얘기를 좀 더 풀어보자면,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읽으면 좋을 만한 책들이 있다. 좋은 책이라면 도서관이든 침대 위든 서재에서든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읽기 좋지만,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으로 번잡한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읽기에 특화된(물론 이를 의도하고 책을 만들지 않겠지만) 책이 있다.
한번은 호기롭게 한길사(두꺼운 양장본의 학술서를 많이 펴내는 출판사로 유명하다)에서 나온 두툼한 『감정은 사회를 움직이는가: 공포 감정의 거시사회학』를 출퇴근하며 읽은 적이 있다. 400쪽이 넘는 양장본인 터라 내용이 이해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들고 다니기 힘들었다. 벽돌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 기분이었는데, 가방에서 벽돌(아니, 책)을 꺼내고 가방을 선반에 올리는 것조차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 같았다. 분명 읽을수록 배움이 깊어지는 좋은 책이지만 출퇴근 중에 읽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책이다. 긴 시간을 오가며 서서 읽기에는 누가 뭐래도 작고 가볍고, 재미있는 책이 제일이다.
“스파게티 소설이란 내가 만든 말로, 스파게티를 삶으면서 읽기에 적합한 소설이라는 뜻이다. 물론 폄하하는 뜻은 아니고, 스파게티를 삶는 와중에도 무심결에 집어들게 되는 소설 정도로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 무라카미 하루키 글·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김난주 옮김, 문학동네, 179쪽.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대로 때와 장소에 잘 들어맞는 책이 있다. 통근 중에 적합한 책을 ‘통근 소설’이라고 이름 붙이면 어떨까. 소설이라고 했지만 소설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책도 여기에 포함된다.
위에서 인용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도 며칠 전 집과 회사를 오가며 읽은 책이다. 양장본이긴 하지만 판형이 작고 두껍지 않아서 가방에 넣고 다니거나 들고 다니기에 부담이 없다. 또한 수록된 에세이 한 편당 길이가 3~4쪽이라서 중간에 끊겨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글에 녹아든 무라카미 하루키의 재치와 귀여움에 피식피식하는 웃음이 주체 못하고 튀어나와 주변 사람이 이상하게 쳐다볼지 모르는 위험이 있지만.
얼마 전 출간된 따끈따끈한 신작인 소설가 최민석의 소설 『미시시피 모기떼의 역습』도 통근 버스와 통근 열차에서 읽기에 딱이다(그나저나 신간 도서에 따끈따끈한이라는 말이 직접 써놓고도 어색하게 느껴지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따끈따끈하든 뜨끈뜨끈하든 애초에 관심이 덜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읽는 순간 ‘이런 걸 당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거야? 이런 걸 써놓은 작가는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어느새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연발하며 책을 덮기 아쉬워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흠뻑 빠져 읽다가 목적지를 지나쳐도 책임지지 못합니다).
이참에, 주말에 서점에 들러 통근 소설 한 권을 골라서 새로운 한 주의 통근을 책과 함께해보면 어떨까요. 생각보다 재미있고 생각보다 유익한 시간이 될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