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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레이 Jan 02. 2017

통근 일기:3.지하철 여행자를 위한 빈자리 공략 안내서

매일 아침, 지하철에 오르는 것인지 인파 속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승객으로 빽빽한 열차에 오르는 사람이라면 앞으로 하려는 이야기의 의미를 금세 알아차릴 것이다. 만약 이 얘기가 아프리카대륙 어딘가에 있는 차드라는 나라의 올해 평균 기온이 예년보다 0.05도 올랐다는 뉴스처럼 들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어떤 연유로 그러하든 간에 무척이나 부러울 것만 같다. 

 평일 아침 늘 그렇듯이 8시 20분에 운정역에서 홍대입구역으로 향하는 경의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 시간에는 기대할 것도 없이 늘 그렇듯이 빈자리 하나 없으므로, 물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감추기 힘든 아쉬움을 뒤로 하고 좌석 앞에 있는 봉에 살짝 기대섰다. 정거장을 지날 때마다 통로는 통로로서의 역할을 잃어버렸다. 어느새 빈틈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애초의 목적이 통로가 아니라 서 있는 사람을 위한 장소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늘 그래 왔기에 새삼 놀랄 일도 아니지만 사람이 무지하게 많았다.

 세 정거장쯤 지났을까. 한 여성이 함성만 안 질렀지 무성하게 자란 수풀을 헤치고 돌격하는 용감한 병사와 같은 모습으로 내 옆 자리로 비집고 들어왔다.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하면, 나는 봉을 한 손으로 잡고 봉에 몸을 살짝 기댄, 노련한 통근자답게 오래 서서 가기에 최적화된 자세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성이 잔인하게도, 러시아워의 지하철에서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안락인 봉과 그 옆에 나뭇가지 하나 꽂기 힘든 작은 공간을 침략한 것이다. 방심하고 있었던 탓일까, 나는 맥없이 옆으로 밀려났다. 약간의 짜증이 올라왔지만 피차 서서 가야 하는 딱한 처지이고 이래 서 있으나 저래 서 있으나 별반 차이도 없으므로, 주어진 환경에서 가능한 한 최고로 편한 자세를 잡으려 애썼다.      


내 것이 될 뻔한 자리를 빼앗은 그 여자 

그런데 다음 역에 지하철이 정차하자 놀랍고 어이없고, 절망적인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아니 나를 밀어낸 여자 바로 앞에 앉아 있는, 그러니까 불과 한 정거장 전까지만 해도 나와 우연히 눈을 마주쳤다가 다시 어색한 듯 시선을 돌리던 사이였던 그 승객이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 쪽으로 향하는 게 아닌가. 이후에 벌어진 상황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자리는 나를 외딴 섬으로 강제로 추방시킨 그의 차지가 되었다. 그는 버터가 미끄러지듯 매끄럽게 몸을 움직였고, 좌석에 엉덩이가 닿음과 동시에 스마트폰 화면에 눈을 고정시켰다. 부럽고 분했다. ‘내 자리가 될 수도 있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짝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데이트하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는 비운의 주인공이었다. 

 아직도 궁금하다. 내 것이 될 뻔한 왕국을 점령한 그 여자는 설마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바로 다음 역에서 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허허, 별일이 다 있구먼’ 하고 웃어넘길 수 있는 우연한 일일까.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묻고 싶다. 그때 그 일 기억하느냐고. 그리고 그때 그 일이 우연의 일치였는지 아니면 사전에 주도면밀하게 계획한 각본이었는지. 만약 오랜 시간 동안 공들인 분석과 수많은 시행착오를 딛고 만들어낸 작전이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영화 <더 게임(The Game)>의 숀 펜도 울고 갈 정도로 치밀하고 완벽한 구성이었다고, 그리고 제발 한 수 가르쳐달라고.

 아쉽게도(?) 그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어쩌면 그가 나를 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만난다 해도 못 알아볼 게 분명하다. 그때의 충격 때문인지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그러니 편하게 다니셔도 됩니다). 기억나는 건 내가 억울하게 자리를 빼앗겼다는 사실뿐. 그에게 사사받아 절묘하게 빈자리로 치고 들어가는 기술을 터득할 기회도 날아가 버렸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러시아워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능력

곰곰이 따져봤을 때 나는 가지지 못했지만, 그는 가진 능력은 기억력과 순발력이다. 두 가지 능력이 나에게도 있기야 하겠지만, 내가 쌓아 올린 능력의 높이가 동네 야산 정도라면 그의 그것은 에베레스트 산에 이를 것이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중학생과 프로 선수의 대결이다. 애초에 경쟁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굴욕적이지만 실패를 교훈 삼아 배우는 수밖에 없다. “굴욕은 인생을 살면서 필요한 감정이다.”* 이제 지하철과 버스에서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기억력과 순발력이 필요한 까닭을 찬찬히 살펴보자.

 기억력과 순발력의 관계는 자전거 두 바퀴의 관계와 같다. 어느 한 곳에서라도 문제가 생기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서로 밀어주고 끌어줘야 한다. 우선 기억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기억력을 높이는 건지 반복 학습을 통해서 얼떨결에 외워지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결과는 같으므로, 공책을 깨알같은 수학 공식으로 가득 채우듯이 반복 학습이 필요하다. 먼저 한동안 같은 시간의 같은 열차만 타는 것이다. 기왕이면 자신이 내리는 행선지의 출구 쪽과 가까운 칸에 타는 게 좋다. 특히나 환승역이나 회사와 학교가 밀집한 지역이라면 내리는 사람이 많아 출구로 향하는 계단이 밀리므로 조금이라도 일찍 나가는 게 이득이다. 계단이 혼잡해지기 전에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다. 물론 남몰래 연모의 정을 품은 여성이 자주 타는 칸이 있어 꼭 그 칸을 타야 한다면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어쨌든, 매일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칸에 타다 보면 같은 자리에 같은 사람이 앉아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각자의 출근 시간이 일정하고 좌석에는 처음 한두 개 역에서 타는 사람이 앉게 되는데 그 사람들은 일종의 관성의 법칙에 따라 늘 같은 자리에 앉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 사람들 각각은 자신의 회사나 학교가 있는 역에서 내린다. 바꿔 말하면, 위치만 제대로 잡는다면 중간에서 타는 사람에게도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공식이 성립된다. ‘매일 같은 자리에 같은 사람이 앉음’ + ‘그 사람들은 각자의 행선지인 역에서 매번 내림’ = ‘중간에 타는 사람에게도 자리에 앉을 기회가 생김’. 포인트는 자신보다 먼저 내리는 사람과 그가 앉은 자리의 위치를 숙지하고, 열차에 오르자마자 어떻게든 그 앞에 서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어릴 적부터 암기 및 반복 위주의 수업으로 단련된 덕분에 외우는 일 하나는 어느 나라 사람보다 잘할 수 있다. 물론 상대 또한 같은 교육을 받고 자라왔다는 게 애석하지만요.

 다음은 순발력이다. 앉아 있던 승객이 내리자마자 재빠르게 앉는 순발력이 없으면 화룡점정에 이를 수 없다. 대개의 경우 바로 좋은 위치를 선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만, 기억력은 조금 부족하지만 순발력이 탁월한 경쟁자가 가로채기를 시도할 수 있으므로 순발력을 기르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사실 순발력을 단기간에 높이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순발력 향상을 위한 운동을 하는 건 과한 느낌이다. 물론 말은 이렇게 해도, 그런 운동이 있다면 당장에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선택과 집중. 최소한의 노력으로 빈자리를 차지하는 데 유리한 환경을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선 좌석에 엉덩이를 집어넣는 과정에서 방해가 되는 잡동사니를 치워야 한다. 가장 먼저 가방과 쇼핑백을 상단에 있는 짐칸에 올린다. 그리고 소설이 아무리 재밌더라도, 신문에 실린 흥미로운 기사에 시선이 쏠리더라도, 웹툰이 배꼽을 잡을 정도로 웃기더라도 그 사람이 내리기 한 정거장 전에는 호흡을 한번 가다듬고 그것을 덮어야 한다. 잠깐의 번거로움과 아쉬움을 참으면 편하게 앉아서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기술 몇 가지 

이 두 가지만 착실하게 준비하면 당신이 빈자리를 얻는 기쁨을 누리는 일이 몰라보게 늘어날 것이다. 어쩌면 언제 나와 같은 열차를 탈지 모르는 불특정 다수의 경쟁자에게 비기를 공개한 것 같아 손해 보는 장사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한다. 하지만 이왕 꺼낸 거 다 공개해보겠습니다. 영국에 거주하는 디지털 전략가 브렌던 넬슨(Brendan Nelson)은 지하철 통근자를 위한 좌석 확보 전략을 생각해냈다. 그가 제안하는 전략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자리에 앉는 일에 관심이 없는 척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표정관리 기술이 중요하다. 지하철이 텅텅 비지 않는 이상 자리에 앉지 않겠다는 듯이 초연한 표정을 연출함으로써 바로 옆 경쟁자의 방심을 유발하는 전략이다. 

 두 번째는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의 행동 일거수일투족을 예의 주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집중해서 보고 있는 책을 덮는다거나, 귀에서 이어폰을 빼는 것은 곧 내린다는 것을 암시하는 결정적인 단서다. 물론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는 것은 필수다. 여기서 주의할 사항이 있는데, “좌석 점유자의 행동에 당신의 주의집중이 사로잡히면 안 된다는 점이다. 간혹 사람들은 지루하거나 눈을 붙이고 싶어서, 또는 그저 당신의 마음이 요동치는 모습을 즐기기 때문에 읽고 있는 책을 덮는다.”⁑ 자리 앉은 사람은 내릴 때까지 내린 게 아니다. 

 세 번째는 좌석에 앉은 사람이 내리려고 일어설 때 내릴 방향에 맞춰, 그가 걸어 나가기 편하게 몸을 트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가능하면 사람이 덜 붐비는 쪽으로 그리고 출입구와 가까운 쪽으로 나가고 싶어 한다. 이 사실만 기억한다면 어느 쪽으로 몸을 비키고 돌려야 할지 바로 눈치챌 것이다. 그가 나갈 방향을 조종함으로써 근처의 경쟁자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다. 

 빠르기도 중요하지만 똑똑함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마지막은 넬슨조차 자신의 글에 코멘트를 단 몇몇 사람들에 의해 새로이 알게 된 팁인데, 지하철 창문에 반사되어 비친 형상을 이용해 자신의 뒤에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방법이다. 뒤통수 너머의 자리까지 활동 가능한 영역으로 만드는 대단한 기술이다. 물론 이를 실전에서 써먹으려면 엄청난 내공이 필요할 것 같지만 말이다.  

 이로써 탄알은 준비된 셈이다. 탄알을 전선으로 옮기는 것은 당신의 몫이다. 굴욕과 좌절을 딛고 깨달은 이 기술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넬슨 또한 자신이 알려주는 정보가 지하철 여행을 편안하게 해줄 거라고 힘을 주어 말한다. 그런데 그는 더 이상 지하철 내에서 벌어지는 경쟁에 필요한 갈망, 용맹함, 예리함을 잃어버렸다고 고백하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의 회사가 다음 주에 이사를 간다. 새로운 동네는 나의 집에서 도보로 20분 거리다. 나는 지금 꽤나 행복하다.”⁂ 이역만리의 그가 진심으로 부럽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축하의 말을 전하고 싶은 기분이다. 빈틈없는 기술과 치밀한 전략으로 무장한 사람도 한가롭게 걸어서 출퇴근하는 사람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회사가 집 근처로 이사할 가능성도 없고 회사 근처로 이사할 처지도 안 되는 사람은 오늘 아침도 늘 그랬듯이, 새삼 우울해지거나 슬퍼할 것도 없이 지하철에 오른다. 

         


* 다나베 세이코, 『여자는 허벅지』, 조찬희 역, 바다출판사, 2016, 273쪽.

⁑ Brendan Nelson, 「Do you want to sit down on the Overground during rush hour? Then prepare for war」, 2011. 10. 4., on www.brelson.com.

⁂ Brendan Nelson, 「Do you want to sit down on the Overground during rush hour? Then prepare for war」, 2011. 10. 4., on www.brels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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