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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of Pi Aug 16. 2023

운동과 단상(斷想)

8. 수험공부와 독서

2023. 8. 15. 화요일 운동 8일 차


먼저 이 글은 그다지 유익한 글이 아닙니다. 제가 운동을 계속하기 위해서 쓰는 글일 뿐입니다. 운동 의지박약아의 실패기가 될 수도 있는 글입니다. 따라서 무언가를 배우고 알기 원하시는 독자님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시기를 바랍니다.




휴일이지만, 내일 재판 준비로 사무실에 나갔다가 왔습니다. 집에서 사무실에 가는 데 걸어서 10여 분임에도, 사무실에 도착하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힙니다. 태풍 카눈이 지나가면 더위가 좀 가실 줄 알았는데, 여전히 뙤약볕이고 또 후텁지근합니다. 사무실에서 일을 마치고 좀 쉬다가, 헬스장에 갑니다. 쉴 때 책을 조금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좀 길게 시간을 두고 읽었습니다.


오늘 운동(유산소 운동 위주)을 시작합니다. 어제 헬스장에 늦게 와서 하체운동을 많이 못 해 오늘 하체운동을 유산소 운동처럼 했습니다. 근력운동인데도 유산소 운동할 때처럼 숨이 다소 가빠오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운동하며 책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제가 한동안 (공부·일과 관련된 책을 제외하고) 책을 거의 보지 않다가 요즘 일을 하는 중간마다 시간이 나면 책을 읽습니다. 틈틈이 조금씩 읽다 보니 한 책을 오래 읽고 있습니다. 바빠서 한 책을 오래 보는 것이 아니라 사실 제가 이해력이 부족하고 게을러서 그런 겁니다. 그러다가 제가 언제부터 책을 읽게 되었나 생각해 봅니다.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집에서 세 권짜리 삼국지를 읽은 기억이 나기는 하지만, 제 첫 독서가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저는 책벌레와는 거리가 멀고, 더욱이 책도 많이 읽는 편은 아닙니다. 그래도 한때는 어떤 계기로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 계기는 이렇습니다.


저는 초등학생(제가 학교를 다닐 당시는 ‘국민학생’이라고 불렸습니다.) 때까지 세상에 도서관이 있다는 것을 ‘잘’ 몰랐습니다(독서실의 존재도 고등학생 때 알았습니다.).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잘’ 몰랐다는 것은 제가 ‘도서관’ 자체가 세상에 있는 줄을 초등학교 시절 알았겠지만, 제가 도서관을 실제로 접한 것은 중학교에 입학할 즈음이기 때문입니다.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읍내에서 도서관을 ‘실제로’ 처음 접했습니다. 그때 문화 충격받았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책이 있다는 사실과 이 책들을 무료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말이죠. 당시 집에 제가 읽을 만한 책이 몇 권 없었습니다. 제 기억엔 세 권짜리 삼국지, 이순신, 세종대왕, 장영실 등 몇 권이 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시골에서 저만 그런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책이 없다는 결핍감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많은 책을 접하자, 책을 읽고 싶어 졌습니다. 세상도 알고 싶어 졌습니다. 그때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자료실이 열린 시간에 들어가 책을 읽다가 화장실에 가려고 나왔는데 저녁이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한 8~9시간을 자리에 앉아서 책만 본 것이지요. 그렇게 오래 앉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이후에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가면서 또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제가 ‘시험을 위해’ 읽게 되면서 책 읽는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공부한다는 핑계도 있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전공 서적을 읽는다는 핑계로 다른 책은 많이 읽지 않았습니다(대학생 때에는 그나마 시, 에세이를 읽었습니다). 일을 하면서는 일과 관련된 서적, 논문, 판례 등만 주로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요즘은 고전에 손이 갑니다. 정확히는 처음에 의도적으로 접했습니다. 인생은 짧고 읽을 책은 많아 뭐부터 볼까 하다가 고전부터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도가 10여 년간 끊어질 듯 이어진 지금 고전이 조금 재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읽을 때 정신적 쉼을 제게 줍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는 힘들지만 뜻을 이해할 때-보다 정확히는 제가 이해한 듯, 할 때- 희열을 줍니다.


운동하는 습관뿐만 아니라 고전 읽는 습관도 형성되길 바라며, 오늘 운동을 마칩니다.




인간들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명상의 대상으로 되는 것은 그들 내부에 있는 모든 개인적인 것들을 획일성으로 소진해 버림으로써가 아니라, 타인의 권리와 이익을 침범하지 않는 한계 내에서 그 개별성을 계발하고 요청함으로써 되는 것이다···. 중략···.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불쾌감을 준다는 이유로 인해 다른 사람의 선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을 억제하는 것은 그 구속에 저항하면서 드나날 수 있는 것과 같은 성격 이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발달시키지 못한다. 그러한 성격을 가지게 되면, 그것은 인간 본성 전체를 둔화시키고 멍청하게 만든다. 각자의 인간 본성을 공정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삶을 영위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관용은 그것이 어느 시대에서 행사된 정도에 비례에서, 그 시대가 어느 정도나 후세에게 가치 있게 되는가가 결정된다. 심지어 독재조차도 그 속에 개별성이 존재하는 한에 있어서는, 그 가장 해로운 효력을 발휘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개별성을 파괴하는 것은, 그것이 무슨 이름으로 불리어지든지간에, 모두가 독재이고, 그것은 신의 의지를 시행한다고 공언하거나 인간의 명령을 시행한다고 주장하거나 상관없이 독재이다.

이상 존 스튜어트 밀 저, 김형철 옮김, 『자유론』, 서광사, 1992, 86~87쪽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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