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깬 '숨 막히는 연쇄 입질'의 시작

내 낚싯대 끝의 '툭—'이 해변 전체를 흔들어 깨운 순간.

by 석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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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쯤 지났을까 해가 저물고 있었다.

뉴질랜드 하늘은 서서히 붉게 물들었고, 내 안의 기대도 조금씩 저물고 있었다.


그때였다.


툭—


내 낚싯대 끝이 아주 살짝, 흔들렸다.

처음엔 바람인가 싶었다.

괜히 기대했다가 또 허탈해지기 싫어서, 아무렇지 않은 척 낚싯대를 바닥에 내려놨다.

그런데, 몇 초 뒤


툭ㅡ


툭툭ㅡ


분명히, 움직였다.
미세하지만, 확실했다.

심장이 느리지만 느껴질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나는 낚싯대를 들고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낮게 자세를 낮추고, 낚싯대를 조심스럽게 살짝 들어 올렸다.

바닷속 어딘가에서,

뭔가가

살짝,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툭, 툭툭툭—


“어... 어!”


몸이 먼저 반응했다.
낚싯대를 있는 힘껏 위로 들었다.

휙— 낚싯대 끝이 다다다다ㅡ

빠르게 흔들리더니, 이내 크게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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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래미는 아니다.'

릴을 감았다.

잠깐 풀렸다가, 다시 감았다.

그리고 또 풀렸다.

무게가 있었다.

그 저항은, 마치 바다가 내 손을 꼭 잡고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등줄기로 땀이 흘렀고,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팔꿈치를 겨우 고정한 채, 낚싯대를 버텨냈다.


“오오!”


먼저 친구들이 달려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끝까지 릴을 감아야 했다.


한참을 감았을까.


붉은 노을 아래,
거센 파도를 가르고 떠오른 건
내 다리만 한, 은빛의 물고기.
뉴질랜드 카하와이(Kahawai)였다.

다들 소리를 질렀다.

“진짜야?”
“잡았다!”

누구는 카메라를 꺼내 들었고,

누구는 물고기만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사모아 형들이 조용히 웃고 있었다.
그 미소엔, ‘이제 시작이야’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곧 낚싯대를 가진 친구들이 일제히 정어리를 꿰기 시작했다.
“야, 이거 되는 거 아냐?”
흥분한 목소리가 해변을 가득 채웠다.

그 순간,
사모아 형 중 한 명의 낚싯대도 크게 휘었다.
“형도 왔어!”
곧이어, 또 한 친구의 낚싯대가 흔들렸다.


하나씩,
모두의 낚싯대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해변은 어느새 작은 전쟁터처럼 바빠졌다.
성인 다리만 한 물고기를 끌어올리고, 미끼를 꿰고, 또 던지고
사모아 형들은 능숙하게 낚아냈고,
우리 중 한 친구도 마침내 한 마리를 끌어올렸다.


나도 멈출 수 없었다.
정어리를 꿰고, 자세를 잡고, 다시 캐스팅.
첫 입질의 감각이 아직 손끝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마치 그 저항이 아직도 내 손바닥에 눌려 있는 것처럼.

몇 번 더 던지고, 천천히 릴을 감았다.
다시 던지고, 숨을 고르며 하늘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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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이미 지평선 아래로 넘어갔고,

하늘은 분홍빛으로 천천히 스러지고 있었다.

파도는 조용해졌고, 바람도 잦아들었다.
바다도, 이제 낚시가 끝났다는 걸 아는 듯했다.


사모아 형들은 양손에 미터급 물고기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물에 젖은 물고기의 몸체가 팔을 따라 반짝였고,
그들의 얼굴엔 익숙한 만족감 같은 게 떠올라 있었다.
말없이 낚싯대를 접고, 미끼통을 정리하고, 아이스박스를 닫았다.
그 조용함 안에는, ‘오늘은 괜찮았다’는 말이 담겨 있었다.

친구들도 하나둘씩 낚싯대를 거뒀다.

누군가는 고기를 자랑처럼 들고 있었고, 누군가는 빈손으로 조용히 왔다.
하지만 누구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모두가 뭔가 하나씩은 얻은 얼굴이었다.


나는 내 발 앞에 놓인 물고기를 가만히 바라봤다.

뉴질랜드에서 처음으로 내가 직접 잡은 고기.
며칠 전부터 계속 던지고, 기다리고, 또 던졌던 시간들.
마오리 할아버지와 사모아 형들의 가르침.

그 모든 기억의 조각들이 이 고기 한 마리에 겹쳐져,

내 발 앞에 와 있었다.

그리고 낚싯대를 함께 사고 바다까지 따라온 친구들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고 싶다는 그 책임감이 이제는 조금 덜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아이스박스를 열고, 두 손으로 천천히 물고기를 들어 올렸다.

묵직했다.
그리고 이상하게, 따뜻했다.
방금까지 살아 있던 생명의 온기가 손끝에 느껴졌다.

나는 잠시 물고기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아이스박스 안에 눕혔다.

오늘 하루의 뜨거웠던 열기를 담는 것 같았다.


“고마워.”
혼잣말처럼,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조용히, 뚜껑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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