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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민 Jul 09. 2020

단잠에 빠지고 싶다.

<잠에 대한 실패와 두려움>



달콤하다. 생크림이 잔뜩 발린 디저트처럼 부드럽고 달콤하다. 내가 어떤 장소에 있는지 파악할 수 없지만 적당히 어둡고 은은한 조명이 매력적인 곳이다. 아무 생각 없이 이 상태에 취하고 싶다. 본격적으로 몰입하려는 찰나 창문도 없는 이곳에 햇살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환한 빛으로 휩싸였다.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며 무거운 눈을 떴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일찍부터 눈이 떠졌다. 나는 또 숙면에 실패했다.


나는 '낮잠'과 '늦잠'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공감이 어려운 사람이다. 바쁘게 지내다가도 한가로운 날이면 낮에 잠을 잘 수 있을 텐데 그러질 못하고, 피곤한 날이면 늦게까지 잘 법도 한데 그러질 못한다. 사실 잠과 관련된 나의 문제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자려고 누워서도 머릿속 생각은 도무지 차분해지질 않고 잠으로 시간을 소모하는 게 아깝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다음 날 일정을 효율적으로 소화하기 위해서 어떻게 계획을 세워두면 좋을지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다 보니 하루 일과를 마치고 누운 침대에서도 머리는 생각을 멈추지 못한다. 바로 잠에 들기 어려울 수밖에. 사실 학생 때부터 스스로 다짐한 목표가 있었다. 투자한 시간만큼 성적이 아주 높은 편이 아니었던 나는 부지런함과 끈기를 갖춰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자 했다. 그래서 무작정 시작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목표한 바에는 어느 정도 도달했으나 숙면을 잃었다. 부지런하게 생활하고 시간을 생산적으로 사용하려다 보니 낮잠은커녕 늦잠도 허락할 수 없었다.


잠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승무원이라는 직업을 갖게 된 이후부터였다. 구체적으로는 잠이 불규칙적일 수밖에 없는 스케줄 근무에 있었다. 때로는 모두가 일하는 출퇴근 시간에 맞춰서 일하기도 하고, 아파트 단지 어디에도 불이 켜지지 않은 새벽 시간에 출근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쉴 때 출근해서 다음 날 사람들이 출근할 때 해외 숙소에 들어가 잠들기도 한다. 무엇보다 알람을 놓치면 커리어에 너무나도 치명적이기 때문에 잠결에도 긴장을 한다. 나도 참 나인건, 밤을 새우고 한국에 돌아와 아침 일찍 퇴근할 때면 하루를 번 것 같다는 생각에 낮잠도 안 자고 밖을 나선다. 그러던 중에도 잠은 나에게 조금씩 말을 걸어왔다. 어색하게, 천천히.


생활 속에서 피로가 점점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개운하지 않고 정신 차리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커피까지 마시면 잠들기 더 힘들까 봐 멀리하려다가도 카페인보다 독한 내 잡생각이 문제라고 자체 진단하며 커피를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침대에서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려 하는데 귀에서 삐-하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눈 앞이 새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의식을 잃은 건 아니지만 몇 초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서서히 시야가 회복되더니 천장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어지러웠다. 상태가 호전되기까지 약 30분 정도 기다렸다가 병원에 가보니 '이석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요즘 사람들이 잠이 부족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아서 겪게 되는 증상이라고 했다. 어색하지만 꾸준하게 신호를 보내준 잠을 무시해서 경고받은 기분이었다.


이석증을 기점으로 더더욱 숙면을 취하고 싶어 졌다. 부지런함도 좋지만 밸런스를 갖춘 자기 관리가 중요하다 생각했다.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기 시작했다. 언제 어디서든 숙면이 가능한 친구들에게 노하우를 물어보기도 하고 유튜브로 방법을 찾아보기도 하고 잠들기 좋은 음악을 들어보기도 했다. 친구들이 가장 많이 말해준 방법은 잡생각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게 생각보다 어렵다. 여전히 고치지 못한 버릇이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안대나 귀마개를 이용해 보라는 게 있었고, 아침 일찍 깨는 거면 암막커튼을 설치하라는 것도 있었다. 그중 흥미롭기도 했고 잠깐의 효과도 있었던 방법으로는 ‘피곤하다졸리다피곤해죽겠다'라고 최면을 걸며 잠들라는 게 있었다. 흔히 졸음이 쏟아진다는 독서를 시도해봤지만 독서량만 늘었다. 모든 시도가 유효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론 실패의 연속이었다.


점점 잠이 어려워지고 두려워졌다. 이대로 포기하고 잠 외의 다른 방법으로 피로를 해결해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는 단계도 있었다. 벌써 포기하기엔 노력이 부족했다 위로해보지만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세상에, 잠을 두려워하게 되다니. 스스로가 안쓰러워졌다. 하지만 두려움을 거둬내면 거둬낼수록, 여러 번의 시행착오 속에서 내 문제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었다. 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내려는 것에 대한 집착이 가장 큰 문제였다. 마음가짐의 변화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안도할 수 있었다. 그래, 잠을 좀 더 잔다고 이룰 수 있는 걸 못 이루지 않는다. 조급하지 말자고 타이른다. 잘 살아왔다고 토닥이니 자존감이 더 단단해진다.


달콤한 꿈을 꾸며 푹 잠들고 싶다. 하루의 마무리와 시작을 가능한 가뿐하고 상쾌하게 맞이하고 싶다. 여유로운 어느 날의 낮시간, 편안하게 잠을 자며 단꿈을 꾸는 날이 찾아올까? 부드럽고 달콤한 꿈속에서 오랫동안 깨지 않고 늦잠을 즐길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잠에 관심이 많아져서 다행이고 오랜 시간을 흘러 문제를 인식하게 됐다는 것이 희망적이라 생각한다. 여전히 서툴지만 잠에게 한 발 더 다가가 본다.


깜깜했던 방 안에 조용하게 타오르는 양초 하나가 보인다. 촛불은 미동도 없이 봉긋하게 타오르고 있다. 그 옆에는 부드럽고 편안한 침대에 내가 누워있다.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눈을 감고 있다. 내 방에 양초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내 방, 내 침대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일은 왠지 날이 좋을 것 같다. 어쩌면 단잠에 빠진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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