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강박증의 정리 1) 카톡채팅방

20230326

by noname

저장강박증으로 진단받은 것은 아니지만, 남들이 보기에 쓰레기로 보이는 것들을 버리지 못한 채 집에 한가득 모셔두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조심스러운 표현이지만 어느 정도는 '저장강박증'을 갖고 있는게 아닌가 스스로 생각만 하고있다. 그동안 상담을 받아왔지만 정확한 진단명을 받아본 적이 없기도 하고. 다만 겪고있는 수 많은 불편함 중 외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이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는 형태일 것이라고 생각은 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나는 나의 모든것을 간직해두려고 했고, 종종 한다. 언젠가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좋았던 기억을 물건에 담는다는 느낌도 있다. 일상을 빼놓지 않고 모두 기록했다. 당연히 영수증도 모두 모았으며, 일거수 일투족 사진을 촬영해서 프린트했고 그 순간에 생각했던 것들이나 느낀점 등을 놓치지 않고 적었으며 인상깊었던 대화내용을 모두 적어 옮기는 등의 행동을 했다. 껍질만 남은 과자봉지, 눈물을 닦았던 휴지, 내 시야를 함께한 소프트렌즈 등 모든 것을 일기에 붙이거나 지퍼백에 보관했다.



이 모든게 부질없다고 느끼게 된 계기는 남편의 한 마디였다.

'넌 일기를 써도 다시 펴보질 않잖아. 기록해둔 것을 읽어야 기록의 가치가 있는데 넌 읽지도 않고 쓰고 쌓아두기만 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나는 꽤 잘 잊어버리는 편이었다. 특히 내가 한 말이나 행동에 대해서는 거의 분단위로 휘발되는 느낌이다. 말을 하고 있으면서도 내가 무슨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순간이 있기도 하고, 행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어떤 생각을 갖고 행동하는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자주 잊었다.

한편, 남편의 한마디를 듣고 좌절했다. 기록하는데 수많은 시간을 썼지만 정작 읽지 않았고 나를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쓸 시간도 없는데, 언제 읽어?

'넌 언제 쓰는데?'

시간 날 때 아니면 퇴근하고 와서 1시간정도

'읽는것도 시간을 내서 읽어야 하는거야'




그 이후로 신기하게도 그 어떤 것도 쓰지 않았고, 모으지도 않았다.

쌓아두는 일이 없었고 오히려 다 버려버리고 싶어졌다.

내가 한 모든 저장과 기록의 일들이 부정당했다는 불쾌함이 있는데, 회고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내 모든 행위가 쓸모없고 아무것도 안해버리고 싶어졌던 것 같다.


작년 7월에 반 강제로 이사를 한 후, (전세 집 주인이 재건축을 하겠다며 나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포장이사를 했기 때문에 내 짐들은 새로운 공간에 적당히 배치되었다. (이사업체에서 꽤 힘들어 하셨다. 내 짐때문에)

어떤 것도 버리지 않았지만 매일 입는 옷 몇개와 가방을 제외한 물건 대부분은 손을 하나도 대지 않았다.

내 무의식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애지중지(?) 소중하게 여겼던 내 물건들을 그냥 싹 다 갖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다 버리면 후회할 것 같아 아직도 손을 못댄 상태이다.




새로울 것 없는 무기력한 2023년이 시작되었고, 당연히 새해 다짐은 생기지 않았다.

정리를 할 생각도 들지는 않았고 그저 너저분하고 정신없는 공간을 방치해두었었다.

하지만 이것이 정리를 해야겠다는 마음의 에너지조차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며칠 전에 깨달았다.


한편, 이사한 후에는 옷을 갈아입을 때 빼고는 내 방에 들어가는 일이 없었다. 식탁이나 침대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거나 일기를 썼다. 이는 공동 생활에 피해를 주기도 하고 (세대원은 쉬고 싶은데 내가 침대에서 노트북을 하면 서로에게 방해다) 내가 하는 것들에 집중도 떨어지는 행동이었다.


정리하지 못한 물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오히려 방 주인은 추방당했다.

이 전세가 얼마짜리인데, 내가 내 공간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는게 또 패배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방을 한번 뒤집기로 결심했고, 방 구조를 바꾸었다.


구조 바꾸기 전, 프라이빗을 노렸으나 방 주인까지 출입하기 싫어지게 만든 4*4 수납장의 배치
구조를 바꿔보겠다고 뒤엎은 상태, 방이 좀 더 넓어보인다.


가구 배치만 바꾼 채 3주가 지나갔다. 겨우 벗어놓고 쌓아둔 옷가지들을 정리한 후 컴퓨터 전원을 연결해서 이 브런치 글을 쓰고 있다. 친구가 빌려준 '정리 못하는 사람을 위한 정리책' 일 읽고 감명을 받은 부분이 있는데, 이 책을 읽기까지도 2주가 걸렸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집에서 좀처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 공간을 잃으니 내 시간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습관처럼 넷플릭스를 켜서 거실에서 술을 마시며 영상을 계속 시청하고 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카페나 도서관 등과 같은 장소에 가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집중할 수가 있었다. 전세 이자가 아까워서라도 이 집의 내 방에서 보내는 시간을 늘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후 내돈.


이 책을 읽고 마음이 가벼워졌다.


물건을 버릴 수는 있지만 시작이 버겁기는 하다. 하지만 해야했다.

물건 뿐 아니라 뭔가 내 머리를 채우고 있는 다양한 것들을 비워보자고 생각했다.

그 중 첫번째, 가장 만만한 것이 '대화에 참여하지도 않고 심지어 내용을 읽지도 않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이었다. 정보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 관련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어서 오픈채팅방에 들어갔지만, 정작 밀려드는 일상 때문에 자격증 공부나 취미생활을 시작할 수가 없었고 오픈채팅방은 +300 읽지 않은 메시지가 쌓여갔다.

또한 업무 중 틈틈이 날아오는 광고 카톡이었다. 홍보마케팅 업무 특성상 '카카오톡 채널'을 운영할 경우를 대비해 다양한 채널들을 친구추가 해두었었다. 당연히 정보성의 콘텐츠라고는 해도 알림 자체가 업무 집중을 흐리기도 하고, 메시지를 무시하더라도 카톡에 읽지 않은 메시지가 쌓이는 것이 좋지만은 않았다.


나는 다들 나같은 줄 알았는데, 카톡에 999떠있는걸 본 친구들은 기겁을 한다..



사실 채팅방에서 나가는 것은 쉽다. 그 동안은 왜 못했을까?

안한 것은 아니고 못한 것이었다. 내가 그 방을 나가면, 그 활동들과 영원히 멀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오픈채팅방은 필요에 의해 나갔다 들어가는 것이 자유롭다. (방장에게 쫓겨나는게 아닌 이상은 말이다)

이 글을 쓰면서 악기연주 방과 자격증 방을 잠깐 나갔다.가 할 말이 있거나 나누고 싶은 정보가 있을 때 참여할 것이다.

그리고 몇개 브랜드의 카톡 플친방을 차단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사실 읽지 않는 채팅방을 유지하기 보다는 차단하는 것이 서로에게 이득이다. 기업도 메시지 발신 수가 줄어들면 비용이 소액이나마 줄어들테니 말이다.



대단한 결심을 했지만, 오늘 한 것은 카톡방 몇개 나간 것과 원래 하던 분리수거 정도이다.

하지만 이정도 실행한 것에 대해 스스로 칭찬을 해줄거다. 이렇게 정리한 일에 대해 기록도 했으니 말이다.




문득 카톡의 연락처까지도 정리할까 생각했는데 이건 다음에 하기로 한다. 정리하면 연락처에 남는 수가 몇 안될 것 같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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