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을 타도 명함도 못내밀어요

두개의 승마법을 수집한 사람의 이야기

by 노난


간밤의 기억을 깨끗하게 세탁하고 승마장에 도착했다

원장님한테 인사를 하고 보드 앞으로 갔더니

밤코치님이 말했다

"오늘은 루이하고 타시네요"


야호! 루이다! 내 찰떡친구 루이! (ㅎㅎ..)

마방으로 가서 루이의 방문을 여는데

루이는 건초를 야무지게 먹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목을 쓰다듬으려다가 먹는데 건들면 싫어할 거 같아서

옆에서 질척거리면서 서있었다

맛이써영? 루이 건초 조아해영? 무슨 맛이에영?


루이는 건초가 너무 맛있어서 멈출 수가 없는지

시간이 흐를수록 건초에 빠져들었다

재깍재깍 시간이 가고 있길래

슬금슬금 목을 쓰다듬으면서 고삐를 쥐려고 하는데

얼굴을 내 쪽으로 틀어서 단단한 코로 내 팔을 밀어낸다

콧구멍 안에 건초가루가 잔뜩이야

너무 귀여워...


루이가 밀어내는 덕분에 내 옷에도 건초가 잔뜩 묻었다

크. 이런 거 좀 미국 서부 대평원에 사는 목장주 같은 모습 아닌가.

내가 상상하는 나.jpg / 사진출처: 뉴욕타임즈

아무래도 맨날 먹는 건초가 맛있어서가 아니라

초보승마자랑 뺑뺑이 돌러 가는 것이 귀찮아서

건초에 몰입하는 것만 같길래

고삐를 쥐고 강단있게 마방을 나섰다

미안미안 하면서 방향을 앞으로 트니

한두번 크흥크흥 거리다가 앞을 향해 뚜벅뚜벅 걷는다

쿨해


도착한 승마장에는 라면코치님이 있었고

함께 배울 여자분도 있었다

그런데 동료분의 말이 꿈쩍을 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말은 이름이 '칸'이라고 하는데

코치님은 '소'라고 부르고 싶다고 했다

칸(징기스칸)을 모욕하면 몽골에서는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 생각났다


몽골에 여행갔을 때 들은 건데

한국인이었던 여행사 사장님이 아무것도 몰랐을 시절

기르는 용맹한 개의 이름을 '칸'이라고 이름 지었고

광장에서 큰 목소리로 개를 '칸!!' 이라고 불렀다가

그 목소리를 들은 몽골인들의 표정이 험해지면서

정말로 위험한 상황에 처할 뻔 했다는 이야기.

말하고 싶어서 입이 간질간질하지만

다음 스몰토크를 해야할 타이밍을 위해 일단 킵해둔다


코치님은 칸이 도무지 안움직이니

루이가 앞에서 칸을 리드해주자고 했다

내가? 내가 누구를 리드해? 내가 리더라고??? (아니 루이가 리드한다고..)

나는 너무 흥분되어 허리를 세우고 앉아

루이에게 리더의 혓소리를 선보였더니

루이가 혓소리 두번만에 뛰기 시작했다!

루이는 정말 나의 찰떡친구야..

쯧쯧 루이 짱짱


하지만 칸은 보통내기 소가 아닌지 이 늠름한 리더를 따르지 않았다

한바퀴나 겨우 달려주고 다시 우뚝 서버린다

몇번이 반복되자 코치님이 루이는 원 밖으로 크게 돌고

칸은 원 안에서 작게 돌자고 했다


원 밖으로 나서자 마자 루이가 뛰기 시작한다

별 노력 없이도 달려주는 루이 덕분에

경속보를 무한반복할 수 있었다

무슨 건초를 먹었길래 이렇게 힘이 솟는걸까

리듬이 점점점 빨라져서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데

코치님이 리듬이 엉킬 때는

앉은 상태에서 엉덩이를 땅땅 두번 부딪혀서

리듬을 다시 맞추라고 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지? 하고 엉덩이를 땅땅하는데

놀랍게도 리듬이 바꼈다


동료분은 칸을 움직이게 하려고 진땀을 흘리고

코치님도 같이 칸을 걷게 하려고 어르고 달래는데

루이는 그 옆에서 망아지처럼 뛰고

나는 그 위에서 용수철처럼 띠용띠용띠용띠용


발 뒤꿈치에 무게를 줘서 균형잡힌 경속보를 하고 싶은데

반동이 너무 커서 자꾸 등자 속으로 발이 쏙쏙 들어가 버리고

그럼 등자가 발목을 쳐서 발목이 아픈데

아플 틈도 없이 루이는 뛰고 나는 트랙을 돌고 돈다

튀어올라 본 너머의 하늘은 파랗고 그 아래 구름은 뭉게뭉게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회원님 오늘 완전 칸한테 조련당하시네요.

라고 코치님이 동료분께 말하는데

동료분의 표정은 담담하다


-

그래도 칸이 아까보다는 훨씬 잘하고 있어요

제가 처음 타본 말이 칸이거든요


헙.

처음 타본 말이 칸이었다니!

뭔가 이 말에 코치님과 나는 숙연해져서

동료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둘에게는 우리가 모르는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뭔가 칸 흉을 본 것이 겸연쩍어진 코치님이 이어서 말한다


-

첫 말은 아무래도 애틋하죠

다들 첫번째 말은 기억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칸이 말을 안들어도 그렇게 편안하셨구나

말이 말을 안들으면 짜증내시는 분들도 많은데


-

그런거같아요

그런데 얼굴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만 기억하는 거니까 그게 좀 미안하죠..


뭐죠 이 바다처럼 넓지만 봄바람처럼 따뜻한 마음씨는ㅠㅠ

루이 잘달린다고 우쭐했던 나 자신 너무 초라하잖아요!!


나도 그렇다

나에게 처음 등을 내준 소망이의 얼굴을 구분할 수 있냐하면

그렇지 않다

이 소중한 처음을 이름으로 밖에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어쩐지 조금 미안하고 슬퍼서

다음에 마장에 가면

소망이의 특징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했다

소망이는 어떤 얼굴을 가진 말인가


승마장 안에 잔잔한 감동이 불어오는데

라면선생님이 한마디 한다


-

그쵸 다들 첫말은 기억하시죠

근데 저는 기억도 못해요

너무 많은 말을 타서는 이름도 기억 못해요 껄껄껄


분위기 깨고 미안했는지 갑자기 이런 말도 덧붙인다


-

말을 오래 탄다는 말은 정말 다양한 말을 탄다는 말이거든요

오늘은 회원님이 루이처럼 잘 달리는 말을 타셨지만

내일은 또 어떤 말을 탈지 모르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 말은 이런 성격이고, 이런 성격의 말을 달리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되고

또 저 말은 저런 성격이라, 저런 말을 달리게 하려면 또 어떻게 해야되고

그게 매번 달라져요

어떤 말을 만나든 배울 점이 생기는거에요

그래서 말을 잘탄다는 것은 한 마리의 말을 잘탄다는 게 아니에요

어떤 말을 만나도 잘타게 됐을 때 그때가 정말 말을 잘탄다고 할 수 있어요


30년을 타도 이거는 힘들어요

그래서 저도 어디가서 말 좀 탄다고 안해요

20년 정도 탄거는 명함도 못내밀거든요


이럴수가.

유튜브를 보며 말 잘타는 법을 배워볼까 했던 나는

안달리는 말을 타면 레슨 공치는 거라 생각했던 나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말을 잘 탄다는 것은

어떤 말을 만나도 탈줄 알게 된다는 것

기술을 외워 익히는 것이 아니라 그 많은 특징들을 경험하는 것

그것은 깊이의 문제인 동시에 넓이의 문제이기도 한 것

종과 횡으로 말을 배워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말을 만나도 배우는 것이 있다

너무 멋지네


소망이는 혓소리를 삼십번쯤 내고 발꿍을 세번쯤 했을 때 달리는 말

그대신 한번 달리면 안정적으로 낮고 묵직하게 뛰는 말

그래서 리듬을 한번 타면 편안하게 탈 수 있게 해주는 말


루이는 혓소리를 두번만 내도 발이 스치기만 해도 박차고 나아가는 말

용수철 처럼 높게 뛰어오르고 지치지 않고 뛰어가는 말

그래서 리듬을 계속 수정만 하면 나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해주는 말


나는 두마리의 말을 만나보았고

두개의 승마법을 배웠다


레슨이 끝나고 코치님이

오늘은 말을 타고 마장으로 가보자고 했다

지붕을 벗어나 넓은 하늘 아래 루이를 타고 걸으니

정말 좋은 하루였다는 기분이 들었다


루이에게도 칸에게도

좋은 하루였기를


건초 먹는 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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