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말, 퀸

물어볼게 너무 많은 사람의 이야기

by 노난


비가 꽤 많이 내리는 토요일,

2주만에 승마장에 갔더니

오늘 내가 탈 말은 '퀸'이라고 했다

퀸이라면 암컷 말인가?

지금까지 탔던 말은 모두 숫컷이었기 때문에

나는 퀸이 궁금해져서 얼른 장비를 갖추고 마방으로 가려고 하는데

원장님이 비가 온다고 먼저 원형승마장에 가있으라고 했다


그러면 나의 퀸은 누가?하며 둘러보는데

사무실에 있던 꼬마에게 퀸을 승마장에 데려다줄 수 있냐 물었다

마치, 테니스 경기장의 볼보이처럼

하얀색 모자와 하얀색 자켓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영특하고 건강하게 생긴 꼬마아이가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장으로 갔다


승마장에는 처음 보는 코치님이 계셨다

날렵한 몸을 가지셨으므로

편의상 깃털 코치님이라고 해보자

오늘은 함께 배울 동료분이 있었고

동료분은 저번에 내 친구가 탔던 오공이를 타고 계셨다

부츠도 신고 자세도 꼿꼿한 것으로 보아

초보지만 나보다는 높은 초보인것 같아서

경쟁심이 이글이글 피어올랐다


퀸이 도착했다

밝은 갈색의 커다랗고 늠름한 말이다

곁에 가서 꼬마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데

코치님이 말의 컨디션에 대해서 꼬마에게 묻는다


"퀸은 어떠니? 00가 필요할까?"

"아뇨. 퀸은 되게 무거워요. 00은 필요없어요. 안장만 있으면 돼요."

"그럼 오공이는?"

"오공이는 필요해요. 오공이는 가볍거든요."


나는 꼬마가 데려다 준 퀸에게 올라타면서

코치님의 부탁으로 00이를 다시 가지러 가는 열살 남짓의 꼬마를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엄마가 생선가게를 하셔서

냄새만 맡아도 그것이 무슨 생선인지 안다는 이영자처럼

나는 경험으로 깨우친 지식이 많은 꼬마들을 동경한다

철도 앞에서 자랐기 때문에 기차에 대해 줄줄 읊어대는 꼬마라던지

미군부대 앞에서 자랐기 때문에 스팸깡통을 눈감고도 까는 꼬마라던지 (전후세대냐..)

너무 멋지다 말에 대해 빠삭한 꼬마라니!

그나저나 00이 대체 뭔데? 왜 나는 모르는 이야기 하는건데?

(그것은 고삐 외에 말에게 거는 얇은 가죽 끈이었는데 이름은 끝끝내 외우지 못했다)


깃털코치님은 지금껏 만난 코치님들 중

가장 교과서적인 분으로서

나는 이 다섯번째 승마교습이자 50분간의 수업 동안

정말 많은 승마이론에 대해 배우게 된다


코치님마다 말하는 승마법이 조금씩 달라서

원장님께 한명의 코치님한테 쭉 배우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했었는데

지난 시간

말을 잘탄다는 것은 어떤 말을 만나도 탈줄 알게 되는 것과 같다는

라면코치님의 이야기를 듣고 감명받아

말의 다양성과 함께 코치님의 다양성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새로 배운 말에 올라타는 법부터 말하자면

왼손으로 고삐와 갈기(말등의 털)를 함께 잡은 후

왼발을 등자에 끼고 올라간다

고삐와 갈기를 함께 잡으라는 것이 놀라웠는데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고삐만 잡았다가는 말이 움직일 경우 떨어질 수 있으니까


퀸은 소망이보다도 꼼짝하기 싫어하는 말이었다

발꿍을 하고 혓소리를 침이 마르도록 해도 뛰지 않았다

코치님은 그런 말을 무거운 말이라 한다고 했다

쉽게 움직이지 않고 상대적으로 둔한 말


그에 비해 오공이는 가벼운 말이라서 조금만 신호를 줘도

잘 움직였다

뒤를 보니 늠름한 자세로 오공이에 올라탄 동료가

자유자재로 오공이를 출발시키고 있었다

말도 안돼 이글이글...


오공이야 빨빨거리고 다니는게 당연하지만

퀸이라면 모름지기 듬직하게 한자리에 앉아서

세상 돌아가는 것도 지켜보고 케이크도 먹고 엉?

암 그러니까 내 말이 퀸이지

근데 누가 말 이름을 퀸이라고 지어서는

이렇게 이름값하게 만든거야...


뛰지 않는 퀸을 몇번이나 뛰게 도와준 코치님이

혼자서 말을 출발시키는 것이야 말로

승마에서 가장 첫번째로 중요한 기술이라며

이제는 한번 혼자서 해보라며 방법을 여러가지로 가르쳐줬다


승마법에는 세가지 부조가 있다

부조란 말에게 보내는 신호를 말하는데

첫번째, 주먹부조는 고삐를 잡아 당기는 신호

두번째, 음성부조는 입으로 혓소리, 채찍으로 소리를 내는 신호

세번째, 다리부조는 발꿍과 다리로 감싸는 힘을 이용해서 보내는 신호


그리고 나중에 기술이 늘어서 고급승마를 배우게 되면

몸의 무게로도 말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서 말이 빨리 뛰고 있을 때 몸의 무게중심을 옮겨 무겁게 하면

말은 앞으로 가던 추진력을 잃고 그 에너지를 위로 쓸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이 마장마술을 하는 말들이 위로 높이 또각또각 걷게 되는 원리라고 했다


나는 초보니까는

퀸을 음성부조와 다리부조로 출발시키는 연습을 계속 했는데

발꿍!을 할때도 정확하고 세게 꿍.

채찍을 쓸때도 정확하고 세게 찰싹.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쉽지가 않다

내가 발로 차고 채찍으로 때리는 것은

공이나 땅이 아니라 말이니까


하지만 코치님은 정확하고 명료한 부조를 계속 요청했다

야무지게 타야한다고 말했다

그래야지만 말을 리드할 수 있게 되고

말을 리드한 후에야

말을 느끼고 교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까스로 혼자 출발시킨 퀸은

출발까지가 힘들었지 한번 뛰기 시작하자

지금껏 타본 어떤 말보다도 부드러웠다

루이가 나를 콩 골라내듯 가지고 놀고

소망이가 나를 업어재웠다면

퀸은 나를 카페트에 태워 부드럽게 띄웠다가 안락하게 내려놓는 기분이었다

아주아주 기분이 좋았다


달리기 시작하면 그 상태로 경속보를 하면서

다리부조를 다양하게 써보라고 했다

섰다가 앉을 때는 털썩 앉는 것이 아니라

양 종아리로 말의 배를 감싸안듯이 조이면서 앉는건데

그렇게 조이기만 해도 속도를 계속 내는 예민한 말들도 있지만

퀸처럼 무거운 말들은

앉으면서 다리를 조이면서 발로 압박을 한번 더 줘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이뤄져야 하는데 주어진 시간은

대략 1초다

헤헤헤 머리가 팽팽도네


남은 시간에는 계속 이것을 연습했다

다리를 조이면서 앉는 것

하지만 정말로 무언가 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다리를 조이면서 앉으니까

몸이 균형을 잡는 기분이었고

퀸과 좀더 한몸이 되어 밀착적으로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다


50분이 순식간에 갔고

동료분은 다음시간에 실내승마장으로 (다음 레벨) 이동하라는 말을 들었다

난..괜찮아..나는 오늘..퀸을 타는 법을 배웠는걸...

나도 잘했다는 말을 세번은 들었는 걸...

실내승마장 그거 뭐...별로 대단하지도 않을걸..


말에서 내려서 퀸의 목을 몇번이나 쓰다듬었다

많이 못달렸지만 너무너무 즐거웠다고

다음에 또 만나자고 말했다

몇번이나 채찍을 써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마방 앞에 도착해서 보니

퀸은 2003년생 독일 출생의 암컷 말이었다

독일의 퀸이었구나

숫컷말과 암컷말은 어떻게 다른 걸까

성격이 다른걸까 체형이 다른걸까

다음에는 코치님한테 그걸 물어봐야 겠다

마방에 들어가는 법도 새로 배웠다

마방에 들어갈 때는 언제나 사람이 먼저 들어가서

크게 한바퀴를 돈다

말의 뒤에 있으면 말뒷발에 채이거나

옆에 있으면 마방과 말 사이에 끼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니

언제나 말의 앞에 걷는 것을 명심하라고 했다


말을 쉬게 할 때 고삐를 정리하는 법도 배웠는데

꽤 복잡해서 까먹었기 때문에

내일 다시 배워야겠다


후.

비가 와서 기온이 낮았는데도 땀이 많이났다

퀸에게 인사를 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소망이와 루이를 보러 갔다


소망이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

평화롭게 건초를 먹고 있는 소망이를 꼼꼼하게 살펴봤더니

등에 하얀 점박이가 하나있고

콧등에도 하얀 점이 하나 있다

되게 멋지게 생겼네


코를 벌름거리며 신나게 건초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루이를 봤더니

이마부터 콧등까지 기다란 흰줄이 있고

콧구멍이 아주 벌름벌름하다

콧구멍에 건초가루가 가득이다

되게 귀여워


내일은 어떤 말을 만나게 될까

퀸을 한번 더 만나고 싶다


루이의 코 벌름벌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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