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의 이야기
시작은 이랬다
처음으로 두시간 연속 강습을 신청해두고 걱정이 됐다
그러다가 주말에 요리를 하고 남은 당근 하나가 생각났고
깨끗하게 씻어서 조각조각 길게 썰었다
어저께 코치님은 말을 야무지게 타야한다고 했지
그래 오늘은 당근을 미끼로
말들에게 야무지게 이쁨을 받아보겠다는 각오다
승마장에 도착하자마자
보드에서 오늘 내가 탈 말
엔젤, 소망이의 이름을 확인하고
마방으로 가서 당근 봉지를 열었다
주황색 빛을 보자마자 말들이 코를 내민다
옆에 서있던 깃털코치님이 싱긋 웃는다
코 앞에 말이 갑자기 너무 적극적으로
입을 내밀어서 나도 모르게 하나를 내밀었다
아이구 잘 먹는다 어구덕어그작
말이 당근을 씹는 소리 말발굽 소리처럼 경쾌하네
당근 하나로 인기인이 된것같아 기분이 좋아졌지만
나는 목적이 있는 당근셔틀
어제 수고한 퀸을 찾아가서 두개
고마워 고마워
오늘 수고할 엔젤과 소망이를 찾아가서 세개씩
잘부탁해 잘부탁해 잘부탁해
과연 당근은 어떤 힘을 발휘할 것인가
엔젤은 백마다
부드럽고 하얀 털 사이사이에 드문드문 검은 점이 보인다
네덜란드 출생의 2012년생 어린 암컷 말
백마를 처음 탄다는 흥분도 잠시
음 이거 뭐지?
발꿍으로 출발을 시키는데 뭔가 느낌이 다르다
어제 배운 뒤꿈치에 힘을 실으라는 것도 뭔지 느낌이 온다
등자에 앞발을 걸치듯이 걸고 타라는 것도 무슨 말인지 알겠다
채찍을 쓸 필요도 없이 엔젤은
발꿍과 혓소리만으로 부드럽게 출발하고
워-소리와 고삐를 몸으로 당기는 것만으로도
브레이크를 밟은 듯 부드럽게 선다
오늘은 출발과 서기를 반복적으로 연습하면서
부드럽게 출발하고 부드럽게 서는 것을
느낌으로 배우라고 했는데
아아 코치님이 말한대로 하면 정말 말한대로 된다!
내가 코치님 말을 듣고 있고 엔젤이 내말을 듣고 있어!
뭐야 어떻게 된거야??
45분이 후딱가버리고
엔젤을 타고 마방으로 갔다
안장을 정리하는 법도 제대로 배우고
엔젤을 오래도록 토닥토탁 두들겨줬다
그리고 다시 밤톨코치님의 지도 아래
나의 소망이와 만났다
소망이가 마방에서 나올 생각을 안한다
소망이 곁에 가서 꿍얼거렸다
소망아 나 기억하지?
아까 내가 당근 준거 기억하지?
맛있었지? 기억하지? 그게 나였어
한번 가볼까?
여전히 나를 귀찮아하는 소망이를 올라타서
경속보 시작
발꿍은 정확하게
혓소리는 크게
소망이는 무거운 말이라서
발꿍을 여러번하고 어쩔땐 채찍도 해야 출발했는데
응??
발꿍 한번 했다고 소망이가 출발한다고?
정말 이렇게 간다고?
밤톨코치님이
소망이를 계속 뛰도록 속도를 유지하고
손을 모으고 고삐를 당겨서 주먹을 꼭쥐고
멀리 보며 허리를 세우라고 한다
고삐를 당기되 적당히 당기는 것
너무 당기면 말은 서라는 신호로 오해하고
너무 안당기면 고개를 틀어 방향을 제멋대로 바꾼다
적당히 당겨야 긴장감있게 앞으로 간다
그 적당히란 무엇이냐면
그것은 해봐야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응??
적당히가 뭔지 좀 알겠는데??
고삐가 긴장감있게 당겨지자 허리가 저절로 세워지고
앉았다 일어섰다가 과장되지 않게 적당히 일어서게 되고
발뒤꿈치에 힘이 실어지면서
등자 안으로 발이 빠지지 않는 걸?
뭔가 말과의 호흡이 달라진다는 기분이 들었다
중반부부터는 정말 확실하게 느낌이 왔다
말에 정말 타는 기분이었다
힘이 엉뚱한 곳이 아닌 정확한 곳으로가고 있다는 기분이었다
무엇을 잘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기분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0.5초도 못하던 버티기를
반바퀴 가까이 해냈다
뭐지????
와 뭔가 가벼운 동시에 묵직하고
말을 탔는데 말과 나 사이에
거리가 아닌 ‘사이’라고 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생긴
기분이었다
늘 내가 귀찮아서 대충 달리던 소망이가 자세를 고쳐서 성심껏 달리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가 되고 있다 지금
뭔가가 제대로 굴러가고 있어 지금
뭐지????
코치님이 외친다
굿
굿
굿
이제 좀 말타는 사람같네요
두시간을 마치고 다리는 후덜덜덜 흔들리고
등은 온통 땀으로 젖었지만
그 ‘뭔가 된다’는 기분때문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운전하고 오는 길에 말에 탄듯한 기분으로
속도를 내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았다
와
이 기분은 뭘까
오늘 이 시간은 뭘까
아 당근?
당근인가?
당근이야?????
이 모든 것이 당근 때문에 가능해진 것인가?
당근이 윤활제였고 당근이 엔진오일이었어?
와 이 기적이 당근 때문이라면
나는 당근을 믿을 생각이다
나는 당근을 맹신한다
당근의 힘은 전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