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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난 Jun 06. 2021

호심술 트레이닝을 시작합시다


가슴에 화를 품고 선배를 만났을 때

선배가 자신의 이야기를 해줬다


-

청와대 근처를 지날 때마다 사복경찰들이 불러서 어디 가냐고 묻잖아

나는 몇 년 동안 그 앞을 지나면서 매번 대답했거든

사무실이 저기라서요. 삼청동에 밥 먹으러요. 집에 가는 길이에요. 뭐 살게 있어서...

그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도 그냥 관성적으로 대답을 했어

어쩐지 경찰이 물어보면 대답을 해야 될 거 같잖아


그런데 어떤 날에는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나는 한 번도 그 사람한테 질문을 해본 적이 없는 거야

나한테 심지어 자신이 경찰이라고 말한 적도 없고

무슨 이유로 내가 가는 길을 묻는다고 설명해 준 적도 없는데

왜 나는 아무렇지 않게 내 행선지를 다 말해줬을까

왜 나는 한 번도 나의 불편함을 불편하다 말하지 않은 걸까

그러지 말아야지

다음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그래서 연습을 했어

사복경찰이 다가오면 이렇게 말한다

누구신데요?

왜 저한테 그런 걸 물어보시는 건데요?


몇 번이나 연습을 했는데도 또 그 상황이 되면 대답을 하다가

어느 날 드디어 말한 거야


어디 가세요?

누구신데요?

아, 00지부 00입니다

왜 저한테 행선지를 물어보시는 건데요?

아... 길을 잃으신 거 같아서...

저 여기 길 되게 잘 알아요

네.. 안녕히 가십시오

안녕히 계세요


나는 여기까지 듣고

선배 앞에서 박수를 짝! 치며 외쳤다. 통쾌해!

선배가 한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얍!

한번 맞서봤더니 조금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더라고

되게 좋은 기분이었어



연습을 하면 대처를 할 수 있다

대처를 하면 상대의 태도를 바꿀 수 있다

그러면 나는 나를 좀 더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나를 보호한다는 것은 강해진다는 의미야

그 강해지는 것에 시작은 연습이다


나는 선배가 나에게 들려준 이 시도를

나의 화를 돋운 이야기로 가지고 오기로 했다


2021년도에 아직도 그런 일이 있어?라고 놀라서 묻지만

2021년도에도 여전히 폭력과 추행과 희롱이 일어난다

길에서도 대중교통에서도 겪지만 회사에서도 회의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그 고통으로 죽는다


가끔은 나도 "그래도 세상 많이 좋아졌지"라고 말하지만

어쩌면 세상이 좋아진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이를 먹고 직급이 올라가

내가 피해자가 될 빈도가 줄어든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내가 가졌던 낙관이 아찔해진다

여전히 '어쩜 이렇게 지긋지긋하게 세상이 안 바뀌지?'라며

고통을 숨죽이고 있는 사람들이 잔뜩이다


희롱을 한 번이라도 당해본 사람은 안다

나의 소중한 하루가 나의 일주일이

그리고 갑자기 찾아오는 기억이 나의 인생을 어떻게 망치는지

희롱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절대 모르는

피해가 얼마나 지속적으로 일어나는지

그것은 귀찮을 정도로 재생산, 재확대되며 매번 어떤 식으로든 타격을 가한다


그래서 무엇을 연습하고 싶냐면

[호심술]이다

마음을 보호하는 기술


내가 만들어본 [호심술]은

당황해서 아무 말 하지 못하는 상황을

당황하더라도 아무 말을 던지는 상황으로 바꾸는 연습이다

툭 치면 탁. 건드리면 확.

연습으로 갈고닦은 말을 입 밖으로 왈칵 내보내는 연습이다

내 입으로 내 마음을 보호하는 연습이다


-

되게 불쾌하네요.

지금 엄청 부적절한 말 한거 아세요?

아직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너무 놀랍네요.

뉴스 안보세요?

직장 내 괴롭힘 교육 안 받으셨어요?

성희롱 교육 안 받으셨어요?

뭐라고 이 새끼야?

다시 말해봐. 녹음하게 이 새끼야.


자신의 상황과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문장을 만들어

어떤 우발적 상황을 맞이하더라도 나올 수 있게끔

목구멍에 한 개의 총알을 장전해 두는 연습을 시작하고 싶다


언제 어떻게 누구랑 할 거냐면

앞으로 만나는 모든 이와 할 생각이다

나와 술 마시는 사람, 나와 밥을 먹는 사람, 나와 수다를 떠는 사람 모두와

20분씩 시간을 내어 각자의 문장을 만들고 소리 내어 말하는 연습을 할 생각이다

이름은 [호심술 트레이닝]


그리고 여러분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동료들과 친구들과 가족들과 해보는 것은 어떨까

혼자서라고 못할 이유도 없다

희롱과 언어폭력에서 밟아야 추행과 폭력으로 가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내가 말을 해야 다음 세대가 산다는 각오로

그렇게 하루에 20분씩 연습해보는 것은 어떨까

모두의 입에서 "세상 정말 좋아졌지"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한번 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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