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을 시작한 지 14개월, 예정했던 기간보다 더 오래 걸렸지만 앞으로 더 긴 여정을 위해 마침내 한국행 비행기를 끊었다. 마지막 나라였던 칠레에서 카우치 서핑 호스트 가비는 독일에서 태어나 칠레에 이민을 와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어, 영어, 스페인어가 능통했고 크지 않은 집이었지만 여행객들을 위해 흔쾌히 집을 내어주며 그녀의 집은 매일같이 카우치 서핑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가비의 집에서 일주일 동안 머무르면서 딱히 특별한 활동 하거나 근교 여행도 가지 않았다. 가까운 집 근처 산책이나 카우치서핑으로 가비집에 머무는 외국인들과 함께 수다를 떨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루는 가비가 지인 생일파티 자리에 나를 데리고 가줘서 함께 바비큐 파티를 하기도 했다. 칠레의 특별한 음식을 먹어보거나 전통문화를 체험, 관광지 여행도 하지 않고 그저 편안하게 지내다가 아프지 않고 별일 없이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가길 바라고 있었다.
나를 배웅해준 아빠에게 손을 흔들며 검색대로 혼자 들어가 면세점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태어나 처음 비행기를 혼자 타던 것이 벌써 14개월 전이다. 이젠 더이상 면세점을 구경하지도, 비행기 창가 자리를 고집하지도 않는다. 비행기는 기차처럼 그저 하나의 대중교통 수단이 되었고 10시간 넘는 버스는 이젠 애교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1시간씩 걸어서 이동하는 것이 너무나 익숙해진 터라 택시를 탄다는 것은 긴급상황에서나 하는 일이며, 호스텔 공용침실에서 잠을 자는 것은 내 집처럼 너무나 편하다. 14개월 동안 정말 무수히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 다행히 단 한 번도 누군가 나를 해코지하려 한 적이 없고, 아픈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다행히 목숨을 부지하고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에 너무나 감사하다.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우면서 그동안 내가 정말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매번 느끼며 이렇게 오랫동안 여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 보지 못한 곳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에 매번 소름이 돋을 정도다. 지구는 넓고 사람은 많으며 내 평생을 여행하고 살아도 이 세상을 다 못 보고 죽는다는 사실이 아쉽고 놀라울 따름이다.
언어, 역사, 문화, 생김새, 먹는 음식, 건축 양식 등 나라마다, 지역마다 전부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로애락을 느끼는 같은 인간이다. 즉,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은 개개인이 각각 다르지만, 같은 인간이기에 사랑을 받을 때 행복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슬픈 감정을 똑같이 느낀다. 나와 다르다고 다른 시선으로 볼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르지만 결국 같은 인간이기에 서로 포용하고 이해해주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은 개미와 같아서 누구 하나 죽는다고 이 지구가 망하진 않겠지만 인간은 개미와 다르게 지구를 변화시킬 수 있다. 지금 현재 본인 스스로가 행복해야 남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고 그 행복은 이 지구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14개월의 시간은 인간이 태어나 죽는 나이를 100살로 본다면 단 1%밖에 안 되는 시간이다. 물, 컵에 물감을 아주 조금 떨어뜨려도 물색은 달라진다. 1%가 나머지 99%를 완전히 바꿔버릴 수는 없지만 분명 더 나은 나를 위해 이미 변화되고 있었을 것이다.
20대에 이루고 싶었던 지구 한 바퀴를 무사히 마치고 이젠 이젠 뉴질랜드라는 나라에 정착하여 파고들어 가 보려 한다. 나의 세계여행은 계속해서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