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뉴질랜드를 워홀 국가로 정했던 이유는 영어나 돈이 아닌 그저 해외에서 1년 살아 보고 싶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를 와서도 영어학원이나 영어 시험을 준비할 이유가 없었고 오클랜드에 도착하자마자 일을 찾기 시작했다. 나의 영어는 일상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영어권 사람들과 대화를 오래 나누다 보면 영어 실력의 한계가 LTE 속도로 찾아온다. 그리고 이런 부족한 실력은 곧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하우스 키핑으로 일하던 호텔에서 우리 팀은 총 10명 정도였는데, 뉴질랜드 사람, 뉴질랜드 주변 섬나라에서 온 사람, 혹은 일본인, 브라질리안, 인도네시안, 인도인, 필리피노, 한국인 등이 있었다. 그중 가장 듣기 힘들었던 영어는 바로 뉴질랜드 사람(소위 키위라고 부름)의 말이었다. 억양이 너무 강해서 같이 일하는 키위 여자가 하는 말의 20%도 알아듣기가 힘들었는데, 한 번은 내게 와서 다짜고짜 '섭스티어'를 체크했냐고 묻길래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3번을 되물었다. '섭스티어'는 up stairs로 판명되었고 연음에 발음이 뭉개진 채 앞 뒤 맥락 없이 다짜고짜 물었던 터라 추측조차 할 수가 없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아시아인 여자 때문에 복장 터져 답답했는지 그녀의 얼굴에는 '아니, 왜 이렇게 못 알아들어?'라는 듯한 표정이 가득했고 그 후로도 영어를 제대로 못 알아듣고 동문서답하는 나 때문에 결국 참다못한 그녀가 돌직구를 날렸다. '너, 영어를 제대로 하는 거 맞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영어 실력이 이 정도밖에 안된다는 사실에 정말 깜짝 놀랐다. 솔직히 말하면 키위 발음 때문이 아니라 내 영어 실력이 정말 너무나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있을 때나 여행을 할 때는 내가 어느 정도 영어를 좀 하는 줄 알았는데 현지인들과 함께 일을 하면서 나의 영어 수준을 절실히 깨달은 것이다.
이 사건 이후로 나는 도서관에 가서 쉬워 보이는 문법 책 하나를 빌려왔고 매일 1시간씩 책상에 앉아 혼자 공부를 했다. 학창 시절에 이미 다 배웠던 문법들이었기에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책을 편 가장 첫 장부터 난관이었다. 평소에 전혀 쓰지 않고 생각지도 못했던 기본 문법들이 나를 엄청난 충격의 도가니로 빠뜨렸다. 그동안 이런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유치원생 보다도 못한 엉터리 영어를 구사해왔다는 사실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문법책을 보면 볼수록 부끄러운 것은 나의 몫이었고 이제라도 이렇게 다시 문법을 스스로 정리하게 된 것에 대해 감사했다.
문법 조금 봤다고 영어가 한 번에 늘진 않을 터, 영어는 실전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 사건이 하나 더 이었다. 호텔을 관두고 3개월 백수를 거쳐 한국 식당 웨이터로 취직해서 일하던 어느 날이었다. 한국인보다 외국인 손님이 훨씬 많은 식당이라서 영어를 말하는 일이 많았는데 한 번은 키위 커플이 우리 식당을 처음 방문했고 나는 여자 손님에게 음식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었다. 여자 손님은 냉장고에 있는 소주들을 종류별로 보더니 그중 하나를 가리키며 이 소주 알코올이 얼마나 강하냐고 내게 물었다. 순간적으로 '소주는 몇 도입니다'라는 대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도수'를 말하려면 Degree(도)를 떠올리며 ' This Soju is 14 degree '라고 대답하는 참사를 겪었다. 여자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잘 못 알아들은 그녀를 위해 좀 더 천천히 "디스 소주 이즈 14 디그리"라고 말해주었다. 결국 못 알아들은 그녀는 자리로 되돌아갔고 나는 대체 왜 이걸 못 알아듣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말한 이 일화에서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당신도 나와 같은 실수를 할 뻔한 것이다. 그렇다. Degree는 온도의 도수를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라서 소주처럼 알코올 농도에 대해 말할 때에는 퍼센트(%)로 말해야 한다. 외국인 여자 귀에는 내가 계속 소주의 온도가 14도라고 말하고 있었으니 이상하게 들렸을 것이 당연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린 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워서 그 커플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워킹홀리데이 1년은 제대로 무언가를 하기에 길고도 짧은 시간이다. 영어와 돈,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것은 욕심이며 두 마리 토끼를 다 잃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러니 영어 실력도 제대로 못 쌓고 돈도 제대로 많이 못 벌거라면 뉴질랜드에 온 이상, 여행이나 원 없이 하고 가는 것을 추천한다. 워킹홀리데이는 영어 공부도 하고 돈도 많이 저축하라고 있는 제도가 아니라, 적당히 여행할 경비 벌고 놀면서 이 나라에 돈 쓰고 가라고 있는 제도다. 특별한 전문 기술이 없는 이상, 워홀 비자로는 막상 제대로 된 일을 구하기도 쉽지 않으며 뉴질랜드에 살면서 뉴질랜드 사람도 만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경쟁 없이 평온한 곳에서 마음 편히 좋은 것 보고 좋은 것 먹으며 놀다 가겠다고 생각한다면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는 당신에게 제격일 것이다. 다행히도 그런 의미에서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를 즐기고 있다. 행복한 나날 속에서 앞으로 나의 영어실력이 어떻게 변화해 갈지 나 스스로도 궁금하다.
워킹홀리데이와 영어와의 상관관계는 지대한 영향을 끼치진 않지만 1년간 영어권 국가에서 살아가며 무수한 실수와 오해 속에서 반드시 배우는 것이 있다. 영어 실력 향상은 개인 의지에 따라 다르지만 합법적으로 일을 하며 영어권 국가에서 살아본다는 것 자체만으로 정말 소중한 기회다. 나이 서른에 워홀 결정은 더할 나위 없는 신의 한 수였다.
정말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