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잡은 죽어도 안 하겠다며?

by 너나나나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를 처음 왔을 때부터 다짐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한인 잡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신조였다. 외국까지 와서 한국인과 일을 하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영어로 대화하면서 회화실력도 향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인 잡은 철저히 배제한 채 호텔 청소, 식당 주방보조 등의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은 딱히 현지 잡 (키위 잡)이라고 해도 영어를 말할 기회가 없었으며 영어는커녕 청소나 설거지 일을 하다 보니 사람 만날 기회조차 없었다. 그렇게 식당에서 인도인 주방장과 마찰을 빚어오다가 더 이상 못해먹겠다며 5개월 만에 일을 관둔 후 다른 키위 잡을 알아보고 있었다. 다시 곧바로 일을 시작해야만 집 세를 낼 수 있었기에 급하게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전히 청소나 설거지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호기심에 코리아포스트라는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한국인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구인 글을 찾아봤고 가장 최근 올라온 게시글을 생각 없이 눌렀다.


[한국 바비큐 식당에서 홀서빙 1명 구합니다]

홀 서빙이야 워낙 옛날부터 해오던 일이고, 뉴질랜드에 와서도 서빙으로 하루 알바도 자주 뛰었던 경력이 있던지라 주저 없이 연락을 해서 면접 날짜를 잡았다. 한인 잡은 죽어도 안 하겠다던 나는 당장 돈을 벌어 집세를 내야 했기에 그냥 믿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면접 날짜에 전동 스쿠터를 타고 한식당으로 향했다. 사실 이 식당은 예전에 이미 한번 와 본 적이 있는 곳이라 익숙했다. 사실 작년 말에 남자 친구와 함께 이 길을 지나가다가 Korean BBQ라는 글씨에 멈춰 서서 식사를 하려 했지만 가게 사정으로 문이 닫혀있어 못 갔던 적이 있다. 그 일이 있고 2개월이 지난 올해 초, 다시 식당을 찾았는데 늦은 시간에 간 터라 이미 뷔페 음식들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있는 상태였고 음식들도 식어서인지 딱히 맛이 없었던 기억이 있다. 남자 친구는 한국음식을 워낙 좋아하는데 이 식당은 정말 지금껏 가본 곳 중 가장 별로라며 우리 둘은 다신 여기에 오지 않겠다 다짐하곤 했었는데 내가 오늘 면접을 보러 바로 그 식당에 다시 온 것이다.

아직 오픈 전에라 닫힌 문에 노크를 하자 사장으로 보이는 키는 남자가 나왔다. 인상을 쓰고 진지한 표정으로 처음 맞이한 그의 얼굴에서 경계심과 딱딱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전동 스쿠터를 식당 문 안쪽에 세워놓고 우리는 카운터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마주 보고 앉았다. 나는 준비해 간 CV 이력서를 내밀었고 사장님은 대충 읽어보더니 가게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몇 시에 출근을 하고 저녁은 몇 시에 먹고, 어떤 식으로 일을 해야 하는지 등에 관한 기본적인 것들이었다. 그리곤 별 고민 없이 '너로 정했다'는 분위기로


"좋다! 그럼 다음 주부터 일 시작합니다"


라고 말했다.


불과 바로 어제 인도인 주방장과 싸우고 일을 관둔 후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렇게나 빨리 새 일을 구할 수 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그리곤 동시에 '이야, 한인 잡은 하려고 마음먹으니까 바로 취직이 되네'라며 그동안 현지 잡 구한다고 시간과 돈 낭비하고 색안경을 끼고 살았나 조금 후회가 되었다.

말이 한국 식당이지 손님은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훨씬 많아서 오히려 현지 호텔이나 식당에서 일할 때보다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일이 더 많았다. 또한 설거지나 청소를 하는 일이 아니라서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일하는 날 저녁은 뷔페식 한국 음식으로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서양 식당에서 일할 때는 인도인 주방장 기분에 따라서 저녁식사로 피자 몇 조각, 감자튀김 정도를 먹을 수 있었는데 나중에는 이 마저도 아까웠는지 음식을 먹고 싶으면 50% 돈을 내고 먹으라고 했고 또 바쁘면 이 마저도 어려워서 밥을 못 먹고 일하는 날도 있었다. 식당에서 일하면서 오늘은 밥을 먹을 수 있을까 눈치 보고 마음 졸이며 5개월을 일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눈치 보지 않고 한국식으로 식사를 할 수 있다. 한식당 사장님 첫인상은 무서웠지만 같이 일을 하다 보니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평일에 일을 하다 보니 주말보다 사람이 적어서 딱히 바쁘지 않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었다. 비록 최저 시급을 받으며 일을 하지만 꼬박꼬박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점, 딱히 바쁘지 않다는 점, 사람이 좋고 영어를 쓰면서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한인 잡은 한국어를 쓰고 한국 사장님들은 다 이상할 거라는 색안경 덕분에 고된 현지 잡들을 더 많이 경험할 수 있었다. 한인 잡이라고 다 나쁜 것이 아니며 현지 잡이라고 영어 가 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워킹홀리데이를 와서 무시받고 쭈굴쭈굴하게 살던 지난날들을 후회하진 않지만 그런 날들이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라 믿는다. 어디서 어떤 일을 하는가 보다는 일을 하는 나 스스로의 마음가짐이 얼마나 정말 중요한지 배웠다.


이제 곧 끝나는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생활에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벌써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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