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처럼 다가온 당신,
연구소에서 일하기 시작하다.
키친 핸드로 일을 시작하기 바로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매주 화요일마다 문도링고라는 언어교환 오프라인 커뮤니티에 다니던 나는 어느 날 우연히 한국인 아주머니를 그곳에서 만났다. 나이가 지긋이 들어 보이시는 그분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16살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40년 넘는 세월을 보냈다고 했다. 한국말을 할 순 있지만 이젠 영어로 말하는 것이 훨씬 편해졌다고 말하던 그녀의 이름은 재키. 무슨 일을 하시냐 물었더니 과학자라고 답하는 그녀. 마취과 의사인 남편 호세와 함께 문도 링고에 왔다면서 내게 남편을 소개해줬고 그들은 내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는 물리치료사로 일 했지만 뉴질랜드에는 작년에 워킹홀리데이로 와서 호텔에서 청소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백수로 지내고 있다고 답했다. 빨리 일을 구해서 집 값을 내야 하는데 호스텔을 전전하며 지내고 있다는 나의 말에 재키는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더니 나를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연구실에서 일하는데 민 씨에게 일자리를 하나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재키와의 인연은 그날 문도 링고에서 그렇게 처음 맺어졌다.
바로 다음날, 재키는 내가 묵고 있는 호스텔 앞으로 와서 나를 태우고 본인 연구실로 데려가서 이곳저곳을 보여주며 소개해주셨다. 생각했던 규모보다 큰 건물에 압도되었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의미 있고 참신한 내용을 담고 있는 제약회사였다. 그동안 백수로 지내며 이런 곳에서 일하게 될 수 있으리라 단 한 번도 생각보지 못했다. 대체 내가 전생에 뭘 했길래 이렇게 좋은 기회가 운명처럼 내게 찾아왔다는 말인가.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웠고 진짜로 내가 여기서 일해도 되는 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곳에서 내가 하는 일은 청소하는 일부터 서류 작업, 물류 정리 등 직원들이 필요한 것들을 보조하고 도와주는 역할이다. 재키는 아마 내가 한국에서 직업이 물리치료사였기 때문에 물리나 과학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내게 이런 소중한 기회를 부여해주셨을 수도 있다.
백수로 지내는 내내 그동안 호텔에서 모은 돈만 축내며 살았다. 그러던 중 무려 제약회사 연구실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으니 로또에 맞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재키는 내게 가능하면 워크 비자도 지원해 주겠다고 했고 시급도 최저에서 조금 높게 책정해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어안이 벙벙하여 사고 회로가 멈춘 채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곤 기차에서 내려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방금 일어난 일, 내가 보고 들을 것들을 설명하면서 그제야 조금씩 이 엄청난 일이 내게 일어났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키친 핸드 일도 시작하게 되었다. 다행히 키친 핸드는 주말이나 밤 근무였고 연구소는 주중 낮 근무였기 때문에 2개 일을 동시에 할 수 있었다. 이젠 정말 백수 탈출이다.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오는구나 싶다.
운명처럼 다가온 당신,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