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 중 벌어진 코로나 사태

by 너나나나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가 이렇게 다이나믹한 이야기로 전개될지 상상도 못 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카페나 호텔에서 일을 하고 6개월 정도가 지나면 남섬으로 내려가서 농장일을 할 생각이었다. 농장에서 3개월 일을 하면 워홀 비자를 3개월 연장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농장일은 많은 워홀러들이 한 번쯤 꼭 거쳐야 하는 일련의 과정 같은 것이었다. 나 역시 농장을 가려고 계획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오클랜드에서 조차 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3개월 동안 백수로 지내면서 별로 한 것도 없이 시간이 흘러버려 농장을 가는 것 보다도 오클랜드에서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러다 간신히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일을 시작하고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 더 큰 문제가 닥쳐왔다. 바로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감에 따라 뉴질랜드는 신속한 대응으로 국경을 전면 봉쇄하고 전 국민을 집에 가두었다. 당연히 일을 하러 갈 수도 없었기에 이렇게 또다시 경제활동을 못하고 집에만 있어야 하는 건가 싶어 좌절하던 찰나, 뉴질랜드 정부가 지원해주는 보조금이 나를 좌절의 늪에서 구해주었다.

뉴스에서는 연일 중국과 한국에서 하루에 수백 명씩 감염자가 발생한다는 속보를 내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보도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시간이 갈수록 유럽과 바다 건너 미대륙까지 전염되면서 한 두 달 정도로 끝날 그저 그런 바이러스가 아님을 증명했고 이로 인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전 세계를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다. 장을 보러 대형마트에 가면 마치 영화 워킹데드를 보듯 진열당에 물건들은 다 비어있고 바닥은 장난판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나도 마트에서 사람들이 하고 있는 행동들을 보면 덩달아 불안하고 무서워졌다.

하루 24시간 중 가벼운 산책과 마트에 다녀오는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집에서만 지냈다. 집에 있는 요가 매트를 TV 앞에 펴 놓고 유부트와 함께 운동하면서 1시간, 영화 드라마 보기 3시간, 낮잠 자기 2시간, 점심 저녁 요리하기 각각 1시간, 영어 공부하기 1시간 이렇게 하면 반나절은 그럭저럭 보낼 수 있었다. 삭막해진 거리 분위기, 인적 없는 도시, 마치 전원 스위치가 꺼진 것처럼 조용하고 고요한 세상이 되었다. 다행히 나는 정부 보조금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었지만 언제까지 받을 수 있을지 확실히 알 수 없었을뿐더러 일터까지 아예 잃어버리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주변에는 이미 직장에서 권고사직을 받거나 그냥 냅다 잘리는 경우들이 속출하고 있었고 개인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손님이 없으니 적자난에 시달려야 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남자 친구 아리에게 들이닥쳤다. 코로나 사태로 전 세계 비행기가 멈추고 국경이 문을 닫은 이때, 암으로 투병 중이시던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었고 그 소식을 들을 아리는 급하게 아르헨티나에서 자국민 소환용 특별 운행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국경이 폐쇄되어 한번 뉴질랜드를 떠나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웠지만 어머니의 위독함이 더 중요했다. 그렇게 아리를 공항에 데려다주고 인사를 나눈 후 집에 돌아온 나는 거실에 휑하니 홀로 서 있었다. 그때, 이윽고 울려 퍼지는 전화벨 소리. 아리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내게 전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식에 하염없이 울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어머니를 보러 더 일찍 비행기를 타고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리는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지 못해 슬픔에 잠겨있었고 출국하면 언제 다시 뉴질랜드 땅에 돌아올지 모르는 상태로 그렇게 망연자실해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에 있는 우리 집도 코로나로부터 예외는 아니었다. 엄마가 외숙모와 점심 식사를 하고 난 다음날, 외삼촌이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으셨고 혹시 몰라 검사한 외숙모가 그다음 날 양성 판정을 받은 것이다. 부랴부랴 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리면서 손주들을 돌봐주시고 계시던 엄마는 혹시나 본인이 양성으로 나오면 아이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진 않았을까 노심초사하셨다. 다행히 음성 판정으로 한시름 놓았지만 2주간의 자가격리를 하면서 손주들을 돌봐 줄 수 없었고 봐주는 사람이 없어진 조카들은 2주 동안 어린이집에서 친구들도 없이 하루 종일 있어야 했다. 다행히 외삼촌 외숙모도 건강히 완쾌하셨고 엄마도 음성 판정이 나오긴 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코로나가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뉴질랜드에서 지내는 동안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는 안전했지만 주변인들에게 일어나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나를 괴롭게 했다. 하루하루 사망자가 늘어가고 생계유지가 어려워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사랑하는 사람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며 심지어 이로 인해 목숨을 잃는 사람들까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지만 그렇다고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코로나는 역사적으로 가장 끔찍한 재앙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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