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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노 Feb 10. 2016

실패작에서 보물이 된 스톡홀름 바사 뮤지엄

한 소년의 꿈이 찾아낸 보물


한 소년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태풍이나 전쟁으로 가라앉은 배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소년은 방학 때마다 스톡홀름 앞바다에 있는 달라뢰만에서 갈고리로 난파선의 널빤지를 건져내곤 했다.

1939년, 소년은 어느덧 청년이 되어 스웨덴 해군본부에서 기술자로 일하게 되었다. 스웨덴 서쪽 해안을 항해하다 난파선의 용골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나뭇조각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나뭇조각은 좀조개에 심하게 갉아먹혔는지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어릴 때 건져냈던 난파선의 널빤지와 달리 서해안의 나뭇조각은 왜 좀조개에 갉아먹혔을지 궁금하게 생각한 청년은 두 바다에서 바닷물을 떠서 분석해보았다.

서해 바닷물의 소금기는 0.9%로 좀조개가 번식하기에 좋았지만 발트해의 바닷물은 소금기가 0.7%밖에 되지 않았다.청년은 좀조개만 없다면 소금물은 나무를 썩지 않게 지켜주기 때문에, 옛날에 가라앉은 배들도 썩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청년은 17세기 침몰선에 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 무렵 스웨덴 역사학자 닐스 안룬드 박사가 1628년  처녀항해 중에 스톡홀름 앞바다에 침몰한 바사호 관련 기록을 찾아냈다.

청년은 닐스 안룬드 박사의 바사호 관련 기록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몇 년간의 분석과 조사를 바탕으로 바사호가 침몰했을 지점을 유추한 청년은 바사호를 찾기 위해 바다로 나가기 시작했다.

청년이 바사호를 찾기 위해 바다를 탐사하기 시작한 1950년대 초에는 개인이 바닷속 물체를  찾는 데 사용할만한 도구는 밧줄에 달린 갈고리 정도였다. 청년은 배를 타고 밧줄에 갈고리를 달아 바다 밑바닥을 흞었다.

그렇게 청년이 좀조개가 갉아먹은 나뭇조각을 발견한 20살때부터 서른 일곱이 될 때까지 1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1956년 8월, 배에 연결해둔 갈고리에 무엇이 걸렸고 청년이 개발한 도구를 통해 까맣게 변한 떡갈나무 조각이 걸려 올라왔다. 떡갈나무가 바닷속에서 까맣게 변하려면 적어도 100년이 걸린다는 확신을 가진 청년은 스웨덴 해군에 떡갈나무 조각을 가지고 가서 보여주며 바사호를 찾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잠수훈련학교 학생들과 함께 청년은 자신이 떡갈나무 조각을 건져낸 지점으로 돌아가 탐색을 시작했다. 수면 아래 34미터 바닷속에서 잠수부들은 진흙에 묻힌 채 가라앉아있는 목조선을 찾을 수 있었다. 잠수부를 통해 포문이 2열인 것을 확인하여, 청년이 찾던 바사호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스웨덴 국왕이었던 구스타프 6세는 고고학에 심취한 학자이기도 했다. 국왕의 관심 아래 바사호를 끌어올리겠다는 청년의 꿈에 전 국민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관련 학자들과 스웨덴 해군 해난 구조대까지 동원된 인양 계획이 진행되었다.

1956년부터 1961년까지 조심스럽게 몇 단계를 거쳐 바사호는 인양되었고, 마침내 1961년 4월 21일, 바사호가 333년만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옆에는 꿈을 이룬  마흔둘의 안데르스 프란센(Anders Franzén)이 있었다.


스웨덴 TV 방영 당시의 Anders Franzén


그 후 바닷물을 머금은 나무는 공기 속에 그대로 말릴 경우 나무가 10분의 1 크기로 줄어들기 때문에 바사호의 선체에 폴리에틸렌글리톨(PEG)를 뿌려 스며들게 하는 작업을 40년 동안 진행하였고, 1987년 11월에 영구 보존 작업을 마무리하고 1990년 바사호 박물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바사호 박물관은 스칸디나비아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박물관이라고 한다. 바사호 박물관을 보고 나면, 그 외 북유럽에 있는 배에 관련된 박물관을 더 보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다. 그렇게 멋진 박물관이라는 말에 스톡홀름에서의 둘째 날엔 꼭 바사호 박물관에 들려야겠다 마음먹었었다.



바사호 박물관은 초록빛 넓은 잔디밭 위에 떠있는 방주를 연상시켰다. 저 커다란 건물 안에 388년 전의 나무로 된 함선이 있다고 생각하니 마치 경주에서 보던 왕릉 안으로 입장하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얼마나 큰 배가 있을지 기대될 정도로 박물관 입구부터 규모가 남달랐다. 총 두 번의 무거운 유리문을 통과한 후에 드디어 바사호를 만날 수 있었다.



입장하기 전까지는 바사호 박물관에서 '바사호'만 보면 되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스칸센에 날씨가 더 안 좋아지기 전에 가고 싶었던데다가 오래된 것들이 전시된 박물관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바사호는 대면하는 순간 그런 나의 생각을 산산이 부셔주었다.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오래된 함선이 실내에 완벽하게 녹아져 있었다. 너무 크고 웅장해서 한 번에 그 전체를 눈에 담기가 어려웠다.



콘크리트로 마감된 실내와 고풍스러운 바사호의 모습은 썩 잘 어울렸다. 1층에서는 바사호 주변을 따라 걸으며 바사호가 바다에 떠있을 당시의 높이를 감상할 수 있었다. 배의 선수상이 있을 곳에는 커다란 사자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수장된 커다란 목조선을 이렇게 온전히 꺼내 복원하다니 저절로 혀가 내둘러졌다.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시선으로 포문 안쪽을 샅샅이 살폈다. 근처를 돌아보며 관람할 수 있어서 열심히 걸어 배의 뒤쪽으로 돌아갔을 때 커다랗고 웅장하기만 한 줄 알았던 바사호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날렵하게 빠진 선수상 부분의 사자상이야 의례 그럴 수 있으려니 하였지만, 뒤편으로 돌아가자 다닥다닥 붙은 화려한 조각들로 눈이 어지러웠다. 목에 힘껏 힘을 주고 위를 바라보아도 화려한 조각들은 끝이 없었다. 하나하나 세심하게 보려고 하니 그 양이 너무 엄청나서 눈이 빠질 것처럼 아팠다.(실제로 700여개에 달하는 조각들로 치장되었다고 한다.) 이 조각들만으로도 과하다 싶었는데, 뒤를 돌아보니 원래의 바사호가 화사하게 채색되었음을 보여주는 재현도가 프로젝터로 뒤쪽 벽면에 쏘아지고 있었다. 그 옆에는 채색 예상도가 조각 별로 걸려있었는데 그걸 실제 바사호와 대비하며 보다 보니 바사호가 얼마나 화려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박물관의 센스에 놀랍기도 했다. 바사호의 뒤쪽은 화려한 가채를 얹은 여인 같기도 하고( 목이 툭하고 부러질 것만 같은 가채는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지. )무대 화장을 해사하게 한 여배우 같기도 했다. 상세하고 관람객에 이해하기 쉽게 채워진 설명들도 마음에 들었다. 바사호만을 내세우는 흔한 박물관일 줄 알았는데, 바사호만 보기에는 아쉬운 느낌이 들어 스칸센에 가는 것을 조금 미루기로 했다.


장식들의 금색 부분은 실제 바사호에서 금박 장식이 적용되었던 부분이다.


바사호는 사실 실패작이라고 할 수 있다. 1611년에 재위한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2세 아돌프 바사가 세계 최대의 전함을 만들어서 발트해의 패권을 완벽하게 손에 넣기 위해 건조한 것이 바로 이 바사호인데, 1628년  처녀항해를 위해 스톡홀름 항구에서 출항한 직후 돌풍에 균형을 잡지 못하고 바로 침몰해버렸다. 700여 개의 조각과 금으로 장식된 2열 포문의 전함 바사호는 더없이 호사스럽고 강력한 스웨덴의 군사력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렇게 침몰해버렸으니 구스타프 2세는 이 사실을 몹시 부끄러워하며 대포는 모두 건져내어 녹여 사용하고, 돛대는 모두 쳐내라는 명령을 내린다. 왜냐하면 건조 중인 바사호에  이런저런 주문을 넣어 배의 무게 중심을 불안정하게 만든 데에는 구스타프 2세의 잘못이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


침몰하는 바사호의 모습을 재현해둔 미니어처


여하간 바사호는 그렇게 출항한지 몇 분만에 스톡홀름 앞바다에 가라앉아버렸다. 그 내용을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자면, 바사호는 출항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밀려온 돌풍과 무거운 대포들의 반동에 의해 균형을 잃고, 균형을 잃자마자 포문을 통해 밀려들어온 바닷물로 어찌할 시간조차 없이 수장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워낙 갑작스러운 사건인지라, 탑승하고 있던 사람들을 구해낼 틈 없이 바로 침몰했다고 한다. (또르르)



바사호 미니어처. 이 화려한 배가 침몰하는 모습을 본 국민들은 어떠했을까.


그렇게 침몰한 바사호는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진 것 같았지만, 1961년 침몰한지 333년 만에 아마추어 고고학자인 안데르스 프란센(Anders Franzen)에 의해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된다.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던 프란센의 열정이 북유럽 최대 방문객을 자랑하는 바사호 박물관을 있게 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소년 시절의 경험이 새로운 발견과 인식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을 보고, 어릴 적의 꿈을 가슴에 품고 살며 실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다. 실행에 사회적인 서포트가 필요할 경우 적극적으로 지원해줄 수 있는 사회적 토양을 가지고 있는 스웨덴이 부럽기도 했다.


꿈을 이뤄 행복해보이는 Anders Franzén


구스타프 2세를 상징하는 황금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다.
어디에서 보아도 거대한 목재 전함이다.
이 기둥을 타고 올라가면
망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높이가 거의 4층 높이다.


바사호는 원래의 모습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고 어느 배인지 온전히 확인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배다. 하지만 오늘날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자 트립어드바이저에서 스톡홀름의 1등 관광지로 바사호 박물관이 선정된 것은 단지 바사호의 훌륭함 때문만은 아니라 생각되어졌다.

박물관 각 층에 있는 배의 인양 과정에 대한 설명과 미니어처, 영상 자료들과 17세기 전함의 건조 과정에 대한 그림들, 바사호가 침몰했을 당시의 정치 상황을 설명한 자료들은 바사호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했다.

( 침몰 당시 사망했던 사람들의 해골을 토대로 복원한 마스크까지 전시되어있다. 소름)

모든 자료들은 시각화되어 곳곳에서 방문객들에게 스웨덴의 역사와 해양 지식에 대한 폭을 넓혀주고 있었다.


침몰한 바사호를 찾은 곳과 바사호 박물관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구스타프 2세의 명령으로 대포를 회수할 때에 이용했던 다이빙 벨을 체험해볼 수 있는 부스


아이들과 부모님들이 박물관의 곳곳에 있는 다양한 부스에서 체험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들이 눈에 띄었다. 나도 그 중 한 곳에 앉아 배의 균형을 잡는 게임을 해보았다. 간단한 게임이었지만 내가 바사호를 만들어 직접 띄워보지 않아도 어떤 경우에 배의 무게 중심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게 되는지 그런 경우에 바람이 어느 정도 강하면 배가 침몰할 수 있는지 등을 직접 시뮬레이션을 통해 경험해볼 수 있었다.


먼 항해를 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채워야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시뮬레이션을 하고 나면, 바사호의 침몰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가슴 절절히 느낄 수 있다. 빠트리기도 쉽지 않네.


박물관 제일 위층의 난간 옆에 가짜 망루에서 실제로 망을 보는 것처럼 체험할 수 있는 독특한 코너가 있었는데 천진한 아이들은 즐겁게 그 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떨려서 뛰지는 못하고 위에 조용히 서서 인증샷을 남겼다.



개인적으로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영어 가이드를 꼭 듣기를 추천하고 싶다. 가이드가 바사호의 표면에 레이저 포인터로 하나하나 특징들을 짚어주면서 설명해주는데 그 내용이 깊이가 있고 재미가 있다.

반대로 함선과 17세기 해상의 패권에 관한 내용에 관심이 없다면 그저 커다랗고 오래된 배가 있는 박물관으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게는 과거를 눈으로 보고, 누군가의 꿈을 보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박물관 안에서 궁금해했던 박물관 옆 구멍은 독(Dock)으로 사용되던 곳이었나 보다. 바사호 박물관답다는 생각에 웃음 지으며 해가 모두 지기 전에 서둘러 스칸센으로 향했다.






바사호 박물관 The Vasa Museum

http://www.vasamuseet.se/


박물관 홈페이지가 무척 잘 되어있다.

매 요일마다 레스토랑 런치가 달라진다. (참고: http://www.vasamuseet.se/besok/restaurangen )

오픈 시간 : 월요일-일요일 AM 10:00-PM 5:00 (수요일만 AM 10:00-PM 8:00)

스톡홀름 카드가 사용 가능합니다.

요금: 성인 130크로나, 학생 100크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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