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nonce magazine Dec 10. 2019

행복한 사고를 당했다

예술하는 예슬이한테

저녁 8시경 논스 1호점 1층.


여느 때처럼 부엌에서 예진이랑 논숙자들과 주전부리를 하며 주접을 떨고 있는 참이었다. 누구는 두부를 볶고 있고 누구는 앉아서 구경하고 있다. 각자 자기가 맡은 역할을 충실히 잘 수행하고 있는 논스의 주방이다. 나는 앉아서 구경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구경하다가 “한 입만~” 스킬을 시전하면 그렇게 맛있고 웰빙스러울 수가 없다. 그렇게 하하호호 수다를 떨고 있는데 주방 앞 라운지 테이블에서 한 여인의 살짝 쉰 듯한 목소리가 들린다.


.

.


"여러분~ 오늘은 우리가 블라인드 드로잉을 할 거예요"


페인트인지 물감인지 색깔이 덕지덕지 붙은 앞치마를 두른 한 처자의 입에서 나온 말인 것 같다. 뒷모습을 보아하니 예슬이인 것 같다. 새벽에 라운지에서 쇼파와 일체가 되어 간드러지게 어도비 일러스트를 하는 우리 예슬이. 혹시 모르니 확인해보기 위해 가까이 가 보았다.



음.. 그래.. 카페인 과다 섭취로 풀려 있는 눈, 연중 내내 시차 적응을 하고 있는 것 같은 피곤한 인상, 행위예술적 걸음걸이, 그래 예슬이가 맞다. 예슬이 일 수밖에 없다.


오랜만에 보는 예슬이다.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허슬러로서 논스에서 얼굴 보기가 힘든 인물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 만나도 대부분 쇼파에서 자고 있거나, 자고 있지 않을 때는 굉장히 심오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뚫어져라 보고 있기에 말 걸기 자체가 꺼려지는 사람이다. 그래서 겁이 많은 나는 항상 그녀의 강한 Aura(아우라) 주위에 몇 발자국 물러나 있다. 


나의 우주에 들어온 사람은 당신이야 


..라고 말하는 듯한 그녀의 차도녀스러운 품채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그녀의 강력한 다크서클은 나의 폭풍 친화력까지 압도한다. 그런 예슬이가 다소곳이 앉아서 사람들에게 무엇을 친절히 설명해주고 있으니 당연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래서 하던 것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가만히 들어보았다.



“드로잉 클래스가 어쩌고저쩌고..”


“오늘 와서 환영하니 어쩌꾸 저쩌구..:”


.

.


'아, 드로잉 클래스'


그렇다. 매일 수요일 저녁 8시에 하는 예슬이의 "힐링" 드로잉 클래스. 논스 1층 왼편 구석에 비치되어 있는 붓, 물감, 그리고 파스텔들의 주인 되시겠다. 그리고 재료들이 비치되어 있는 곳 옆 하얀 슬라이딩 도어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예술작품들의 탄생 비결도 되시겠다. 여백이 거슬렸던지 1차 드로잉 클래스 참석자들이 예술작품을 완성하자마자 바로 가져다 붙인 것 같다. 여백을 메우기 위해 그림을 그린 건지 그림을 붙이기 위해 여백을 남겨둔 건지는 나는 알 수가 없다. 그저 신비로울 뿐이다. 


미술에는 큰 관심이 없기에 그렇게 오늘도 붓질 몇 번 한 다음에 슬라이딩 도어에 갖다 붙이겠거늘.. 하면서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

.


"오늘은 우리가 캔버스를 보지않고 그릴 건데요~"



'흠, 종이를 보지 않고라..'


얼마나 다들 '한' 그림 하시길래 이젠 종이를 보지 않고 그림을 그린다 하시는가. 교만이 하늘을 찌르나이다..라고 혼잣말을 하는 순간, 마치 반박이라도 하겠다는 듯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 


"이 무한경쟁 사회에서 우리는 남보다 더 좋은 연봉, 남보다 더 때깔 나는 직장, 남보다 더 좋은 학벌 타이틀을 얻기 위해 몸과 마음을 몰아치면서 살아왔죠"


'응?.. 그림 그리는 시간 아니었나?'


"그런 숨 막히는 환경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항상 부합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굉장히 엄격하게 자신을 채찍질하는 '완벽주의'적 성향을 무의식적으로 길러왔을 수 있어요"


깔깔거리며 앉았던 참가자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그런 완벽주의적 태도는 사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아프게 하죠"


'오호라..'


"우리는 사실 실수도 많이 하고 결점도 많이 갖고 있는 결코 완벽해질 수 없는 존재인데.. 그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요"


'그렇지..'


"그래서 오늘은 내 손, 내 마음 가는 대로! 캔버스에 집착하지않고 자신의 세계를 그려 볼 겁니다. 종이를 보지 않는 이유는 또 막 한 획 한 획 완벽하게 그리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사실 예술에선 어떤 것도 정확할 수 없고 정확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에요"  


'호..'


.

.


"당연히 캔버스를 보지 않으면 의도하지 않았던 획들이 나타납니다. 근데 그것들은 ‘결점’이 아닙니다. Happy Accident.. 행복한 사고죠. 그래서 우리는 받아들일 겁니다. 그리고 나의 실수, 나의 결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내가 가지고 있는 불안감, 두려움들 또한 '나'라는 사람의 일부분이고 그 모든 것들을 오늘 받아들일 거예요"


나를 받아들이다


명치 쪽이 따뜻해져 오는 것은 저녁에 같이 먹은 유자차 때문일까. 그 따뜻함에 이끌려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

.


"저도 같이 그려도 돼요?"


"어우야. 당연하죠~ 언능 퍼뜩 앉으세요"


"자 그러면 이 비싼 캔버스를 나눠 드릴게요. 이게 질이 엄청 좋아서 양면으로 그림 그릴 수 있거든요~"


미술 알못으로서 실제로 비싼지는 측정 혹은 증명할 길이 없지만 무튼 굉장히 빳빳해 보이는 새하이얀 종이 한 장을 건네받았다. 


"뭘 그리나요 근데?"


"아~무거나 자기가 그리고 싶은 거 아~~ 무거나 그려도 돼요"


"블라인드니 눈을 감고 그려도 되죠?"


"당연하죠~"


“흠..”


물끄러미 하얀 종이를 바라보았다. 


"근데 선생님.."


"넵?"


"그.. 종이 같은거 안 보고 완벽하게 그리는 사람이 있던데 그럼 그 분은 어떡해요? 한석봉이란 사람도 있고.."


갑자기 맞은편에 앉아 있는 주연이 미간이 찌푸려진다.


"선생님, 오늘 힐링하는 시간 아니었나요?"


"그렇죠. 여러분 오늘은 불필요한 잡담은 하지 않는 걸로 합시다~"


"죄송함다~"


“자 이제 우리 시작할까요~”


.

.


“준비가 되셨으면 바로 그리셔도 됩니다”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싫었던지 누군가 바로 캔버스에 슥슥 휘갈긴다. 나는 아직 눈을 감지 않았다. 슥슥 휘갈기는 사람 옆에는 가만히 명상을 하는 사람이 보인다.


.

.


‘진정한 그림은 역시 데생이지..’


눈을 감았다. 그리곤 나름 6학년 때 한 ‘정밀묘사’하던 나인지라 자신 있게 연필을 들었다. 근데 뭔 대상이 있어야 정밀하게 묘사를 하지 않는가. 다시 교만했던 나 자신과 연필을 내려놓았다.


‘뭘 그리지’


그릴 게 없다면 화분을 그려도 된다고 하는데, 무언가에 이끌려 여기에 캔버스를 앞에 두고 앉아 있는 나 자신과 이 운명 같은 순간을 기념하기엔 그것으론 역부족하다. 


‘아까 그 가슴이 따뜻했던 순간, 그 따뜻함을 그림에 남기고 싶다’


웃을 때도 있고 울 때도 있고 굉장히 많은 감정들이 회오리바람처럼 뒤섞였다가 마지막에는 잠잠해지는 순간, 그 순간을 그려보고 싶다.


.

.

심취


‘스윽’


그렇게 눈을 감고 캔버스에 첫 경험을 선사했다. 스마트폰 스크린이 아닌 백색 도화지에 연필이 처음 닿았을 때의 질박한 촉감, 참 오랜만이다.


'스윽슥슥.. 뚜드드드드'


갑자기 나무 소리가 들린다.


‘뭐지? 책상인가? 


연필이 캔버스 옆을 지나갔나 보다. 그 또한 행복한 사고라 하며 계속 책상에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행복한 낙서를 보며 가슴 아파하는 의준이(커뮤니티 매니저)가 떠올라 손가락 끝의 감각을 되살려 빗나간 캔버스를 다시 내 앞에 두었다. 그렇게 마음가는대로, 내 영혼이 가는 대로 연필을 움직였다.


한 6분 지났을까.. 


눈을 떴다. 옆 사람들은 계속 그리고 있는 중이다. 누구는 천장을 보며 그리고 있고 누구는 화분을 뚫어져라 보면서 연필을 움직이고 있다.


“다 한 것 같으면 뭐할까요 선생님?”


“그럼 이제 색깔을 칠해봐요~ 너무 정직한 색깔을 선택할 필요가 없고요 자기 마음 가는 대로 색칠하세요~”


“색칠은 눈을 뜨고 해요?”


“아 아.. 색칠은 눈을 뜨고 해야죠~”


“색칠도 눈 감고 하면 안 되나요?”


“괜찮긴 한데 책상이 더러워질 때가 많아서요 ㅜ..”


‘젠장. 다 의준이 잘못이다’


그렇게 색칠까지 끝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페이스로 마무리를 하는 것 같았다. 


.

.


“자 여러분, 이제 다 마무리하신 것 같으니 그림을 공개해주세요~!”


다들 쭈뼛쭈뼛 자신의 그림을 손으로 들어 올린다.


“아 참! 그리고 여기서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남의 그림을 좋다 나쁘다 등 판단하시거나 이상하게 해석하시면 안 돼요! 그리고 더더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그림까지 판단하시면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의 작품과 다른 사람의 작품을 ‘감상’ 할 겁니다”


자신 조차 판단하지 마라


크으, 너무 매력적인 말이다. 갑자기 예슬이가 이뻐 보이는 건 원래 이쁜 건가 기분 탓인건가.


그렇게 탄생한 걸작들


그림에 대한 코멘트는 하지 않겠다. 내가 누구라고 남의 무엇을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저 아름답고 황홀할 뿐...


그렇게 평일 저녁, 주방에서 밥을 먹다가 논스에서 행복한 ‘사고’를 당했다.



 작성 Forever Kim



논스 드로잉 클래스는 매주 수요일 20시 논스에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저희 커뮤니티 매니저에게 컨택 혹은 페메 주시길 바랍니다 :)


Every Wednesday Evening


논스 입주하기


1. 도전정신(Challenging the Status Quo
):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자 하는 의지

2. 다양성(Diversity): 나와 다른 삶의 방식을 진심을 다해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

3. 공유(Sharing): 나의 자원을 공유함으로써 함께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믿음

매거진의 이전글 프로골퍼가 레슨 1회당 1만원을 받는 이유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