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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ranger Nov 18. 2020

내 남편은 게임보이

게임을 반세기 째 하고 있는 사람 관찰기


내 남편은 나의 첫 남자 친구였고,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남자다.


처음 이 남자를 보았을 때, 나는 ‘와, 이런 사람 처음 봤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렇게 좋은 사람을 처음 봤다고 생각했지만) 연애에 관심이 없고 독신이었던지라 남자 친구도 없고, 사람도 많이 만나보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수업시간에 게임을 하고, 교수님의 질문을 피하기 위해 선제공격으로 먼저 질문을 하고 그다음에 계속 게임을 하고, 집에 가면 또 게임을 하는 사람은 처음 봤었다.


물론 게임만 한 것은 아니고, 운동도 하고, 음악도 하고, 모임도 하고, 학회도 하고, 공부도 했지만, 이 남자의 일상에는 게임이 항상 존재했다.


이후 이 남자가 내 남자가 되어 만난 지 13년, 결혼한 지 11년이 된 지금까지도 꾸준히 게임을 하고 있다.


게임을 빼놓고 삶을 논할 수가 없는 게임보이로서의 남편을 관찰한 결과,


1. 게임을 잘한다.

네 살, 다섯 살부터 게임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수십 년간 얼마나 게임을 해왔겠는가. 웬만한 게임은 그냥 다 잘하고, 심지어 처음 하는 게임도 시작하자마자 게임의 목표와, 원리, 구조를 바로 파악해버린다. 그리고 혹시라도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게임 전략이 소개된 사이트를 열심히 읽고 공부 한 다음에 실전에 들어가는 노력도 잊지 않는다. 무언가를 잘하는 게 그리 섹시하다니. 게임하는 모습을 보면 엄청 멋지다. 사회에서 만남 남자 어른들에게 남편의 게임 이야기를 하면 나 스스로 엄청 뿌듯하고 남편이 자랑스럽다.


2. 게임할 때 진지하다.

게임은 혼자 할 수도 있지만, 컴퓨터랑 대결하는 것부터 두 사람, 그 이상이 함께 할 수 있는 것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러면 헤드폰과 마이크로 게임에서 만난 크루들과 매우 프로페셔널하게 대화를 하면서 (말투 등 예의를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합심한다. 한 번은 ‘겜알못’인 내가 같이 게임을 하다가 못한다고 좀 구박받은 적도 있다. 그때 정말, 와 ‘게임할 때 진짜 진지하구나’라고 느꼈다.


3. 게임중독은 아니다.

게임하는 도중이라도 내가 어디 나가자거나, 무얼 해달라고 부탁하면 게임 때문에 안된다, 못한다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물론 내가 일부러 게임 열심히 하는데 방해하지는 않지만, 게임 도중 내가 부탁하거나 요청하는 일이라면 곧바로 크루들에게 예의를 갖추고 나오거나 나올 수 없는 상황이면 나한테 양해를 구하고, 중단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바로 중단하고 내가 해달라고 한 일들을 바로 처리해준다. 게임보다 생활이, 게임보다 가족이 더 중요하고 우선이라는 판단이 디폴트로 장착되어 있기 때문에 게임중독은 전혀 의심해 본 적도 없다.


4. 게임에 대한 열정이 있다.

새로운 게임이 나오고, 재밌다는 커뮤니티의 평이 있으면, 해보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일단 게임을 시작하면 매우 열심히 한다. 크루들이 부른다고 나간다기에 궁금해서 따라가 본 적이 있는데, 동네 놀이터에 초등학생, 중학생이 모여 포켓몬 고 레이드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귀여워 죽는 줄 알았다. 비록 거기 모인 크루들 중 남편만 어른이고, 그래서 그 모습이 동네 바보 삼촌 같기도 했지만, 어린 친구들과 레이드 가려고 걸어서, 또는 자전거 같이 타고 10-20분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레이드 다녀올게요” 하고 집을 나서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력이 열정을 이기기는 힘들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3일을 피시방에서 숙식하면서 게임했다는 20년 전 전설 같은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게임한다고 오래 앉아있기가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누워서 모바일 게임을 할 때도 많고, 하나의 게임을 오래 하기보다는 다양한 포맷으로 여러 가지 게임을 하게 되었다. 안타깝지만 받아들여야지.  


남편은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어디로 가든지, 내 옆에서 묵묵히 게임을 했었다. 내가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공부할 때, 집에서 미드를 볼 때, 늘 게임을 하면서 내 옆을 지켰다.


지금은 딸과 같이 게임도 하고, 딸이 아빠가 게임하는 걸 보고 싶다고 하면 피곤해도 기꺼이 딸을 위해 컴퓨터를 켜는가 하면, 딸과 게임 이야기도 나누는  힙한 아빠가 되었다.


나는 한 가지를 이토록 꾸준히, 열심히, 열정적으로 하는 것이 정말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게임일지라도.


 남편은 자랑스러운 게임 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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