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tranger Jun 16. 2021

나를 있는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사람

나의 비건 전향에 대한 남편의 반응

남편을 만나기 전 혼자 사는 동안 나는 비건 지향의 삶을 살았다. 그 이유는 고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고기 굽는 냄새, 고기의 맛, 고기의 색깔 등이 다 싫었다. 그렇다고 회를 좋아했냐면, 그것도 아니라서 그냥 비건으로 살아도 무방한 그런 사람이었다.


오트밀 포리지 만들어 먹거나, 고구마를 전자레인지에 돌려먹거나, 샐러드나 샌드위치면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나의 첫 남자 친구였던 남편은 미트테리언이라 할 정도로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태어나서 이렇게 고기를 특히나 좋아하고 많이 먹는 사람은 처음 봤을 정도다. (태어나서 그렇게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사람도 처음 보긴 했다.)


이런 남편은 1년 전부터 저탄고지로 더 잘 알려진 키토제닉 식단을 해왔다. 매끼 탄수화물은 거의 섭취하지 않는 반면 동물성 지방을 섭취하는 방향으로 준비해야 하는 식단이기 때문에 신경 써야 하는데, 남편은 본인의 식사를 다 준비하여왔고, 내가 협조한 일이라면 장 볼 때 키토 제닉 식단을 꾸릴 수 있는 재료를 좀 더 챙겨보고 외식할 때 메뉴를 고심하는 정도라 할 수 있겠다.


이런 환경에서, 나는 지난달부터 비건이 되기로 결심했다.


비건에 대한 고민은 딸의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 딸은 학교에서 교육을 잘 받아서 그런지, 환경문제에 민감하다. 특히 집안을 돌아다니며 불은 다 끄고 다니고, 씻을 때 샴푸를 두 번 펌핑하면 나에게 돌아오는 딸의 한마디:


"엄마,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마실 물이 없으면 어떡해!"


처음엔 환경을 생각하는 딸의 모습이 귀엽다고만 생각했는데, 찬찬히 지켜보니 딸은 근엄, 진지하게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 있는 거 같았다. 게다가, 나는 중고등학교 때 환경문제를 주제로 영어 말하기 대회도 준비하고, 환경 관련 NGO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도 할 정도로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던가.


딸의 한마디로 인하여, 나도 환경보호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텀블러 활용하고 플라스틱 덜쓰고… 그렇게 저렇게 환경보호에 대한 리서치를 하다가, 넷플릭스에서 카우스피라시, 씨스피라시, 왓더헬스를 보게 되었고, 내가 지구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채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어서 식용으로 사육되는 동물에 관한 책, 자연채식에 관한 책도 몇 권 읽으면서 동물을 먹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비건으로 살아가겠어!


하지만, 이번엔 고기를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구를 위해서. 아이들, 아니 모든 살아있는 생명들을 위해서!


키토제닉과 비건 식단은 약간 겹치는 부분(채소)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매우 다른 식단이다. 키토제닉은 동물성 지방에서 에너지를 얻는 반면, 비건은 '동물성'이 포함된 것은 전혀 섭취하지 않는 식단이다. 달라도 너무 다른... 그래서 혼자 조용히 가려서 먹어왔고, 그러면서도 가족 앞에서는 비건 식단 할 거라는 선언은 하지 않았다. 남편은 키토 제닉 식단에 대한 이론(?)을 믿고 실천하고 있기에, 굳이 내가 "동물" 자체를 소비하지 않을 것이라고, "동물"을 먹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 설득하거나 할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비건으로 살아가는 데 대해서 남편은 당연히 반대하거나 이견을 제시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채식이라는 식단에 대하여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에 대해 약간의 우려는 있었다.


하지만 내가 장 볼 때 "비건" 또는 "vegan"이라 적힌 재료나 상품을 많이 사고, 관련 책도 많이 읽으니 자연스럽게 가족들이 알게 되었다. 그러더니, 요리 담당 남편은 딸 음식에 본인의 키토 식단 플러스 나의 비건 식단에 맞추어 식사를 준비해주었다.


"비건 하세요. 내가 음식 준비해줄게."


와, 이건 상상 이상이다. 아니 남편이 좋은 사람인 줄은 알고 있지만, 마음이 너무 넓은 거 아님?


마음이 넓기도 하지만 매우 열려있기도 하다.


남편에게 비건에 동참하라고 설득할 생각은 당연히 없었지만, 넷플릭스에서 같이 볼 걸 찾다가, 내가 씨스피러시를 보자고 제안하였다. 카우스피러시보다 나는 씨스피러시가 더 충격적이었고 전혀 생각못했던 것이라, 남편도 그럴 거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카우스피러시를 굳이 같이 보자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씨스피러시를 보고 남편 역시 본인도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라 놀랐다고 소감을 나누어 주었고, 좀 충격적이라고도 하였다. 생각해볼 부분이라고도 하였다.


약간이나마 내가 비건으로 살고 싶다고 했을 때, 가족들이 우려할 것을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남편은 내가 동물성 재료를 먹지 않도록 신경 써 주고, 딸도 매번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인지 관심 있게 물어봐준다. 심지어 남편은 비건식 음식을 좀 배워야겠다고도 했다.


내가 남편 덕후인 무궁무진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내가 부족하고 모자란 부분이 있어도, 본인과 생각이나 의견이 다르고, 구태여 본인의 식단과 상반되는 방식의 음식을 먹어야겠다고 하더라도,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아껴준다는 것이다.


비건이든 아니든, 나를 있는 그대로, the whole package 사랑해주는 남편에게 사랑과 존경과 고마움을 표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어머니 예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